“이제 가을인가 봐요. 그렇게 덥던 여름이 금방 가버렸네요.”
한 손에 커피를 들고 걷는 수인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열감기 때문에 아팠다던 그날보다는 훨씬 안색이 좋아서 민재는 내심 안심을 했다.
“감기는 좀 어때?”
“벌써 나았어요. 이제 쌩쌩해요.”
“다행이네.”
“걱정해 주신 덕분이에요.”
걱정을 하긴 했지만 그걸 또 수인의 입으로 들으니 왠지 좀 멋쩍어져서 민재는 괜히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수인은 그리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었고, 민재는 그런 수인의 걸음을 맞춰 걸었다.
아직 캠퍼스엔 남아 있는 학생들이 곳곳에 보였지만, 낮처럼 북적대진 않아서 딱 걷기 좋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수인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민재는 지금 자신의 옆에서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걷고 있는 수인의 모습이 믿어지지 않았다.
7년 전, 아마 그때도 자신은 이런 걸 바랐을 것이다. 출석을 부르며 이수인의 이름을 호명할 때마다 떨리던 가슴, 캠퍼스에서 한 번씩 마주치던 수인을 보며 인사도 못 건네면서 괜히 뭉근해지던 마음은 바로 이런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님 마음에 꼭 드는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민재의 손에 들려진 종이 백을 쳐다보며 수인이 말했다. 지훈이 이것저것 추천을 해줬고 그중에 수인이 괜찮을 거라고 추천해 준 것으로 골랐다.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아마도.”
“교수님은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다정한 아들이네요?”
수인의 말에 민재의 가슴이 뜨끔했다. 다정과는 거리가 먼 채로 살았다. 오죽했으면 모친이 혀를 내두를 정도일까. 그런 민재에게 수인은 다정한 아들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셈이었다.
“열일곱 살 때 부모님이 열차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나지막이 말을 꺼낸 수인은 여전히 앞을 보고 걷고 있었다. 뜻밖의 말에 민재가 수인을 돌아봤지만 수인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동시에 엄마, 아빠를 잃는다는 걸. 그때 굉장히 큰 사고여서 매일같이 뉴스에 나왔어요. 우리나라도 아니고 외국에서 전해오는 사망 소식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았어요. 정말 드문 우연도 있을 거라고, 엄마, 아빠와 같은 이름, 같은 나이의 사람이 하필 그 열차에 타고 있었을 거라고 계속계속 생각했어요. 분명 사고대책반이 나에게 잘못 전해준 거라고.”
수인은 울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하는데 민재는 자꾸만 수인이 울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자꾸 수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밝고 유쾌한 그녀여서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부모님 슬하에 사랑받으며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저리도 밝게 빛나는 거라고 늘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그게 사실이란 걸 내 눈으로 확인한 뒤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야 하는지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아주……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 나를 붙잡아주고 가족이 되어준 사람이 바로 지훈이와 지훈이 식구들이에요.”
“그래서 가족이라고 했군.”
“네. 나는 지훈이 부모님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고 지훈이를 친구 겸 남동생이나 오빠쯤으로 생각해요. 내가 외로울 새도 없이 내 옆에 생긴 공백을 메워줬어요. 그래서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웃을 수 있게 됐어요. 평생 갚아도 모자랄 은혜인데…… 이걸 은혜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그들에겐 서운하대요. 그만큼 정말 날 아껴줘요.”
수인의 말을 들으며 민재는 지훈에게 알 수 없는 크기의 고마움이 밀려왔다. 이수인이 잘 자랄 수 있게 만들어준 그 가족이 정말이지 고마웠다.
말을 하는 내내 천천히 걷던 수인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민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울고 있진 않았지만 눈가가 촉촉한 듯 보였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렇게 불쑥 생각이 나요. 교수님이 어머님께 드릴 선물을 고르는 걸 보면서 나도 이런 효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생각들이 나면 좀 억울해요. 우리 엄마는 가방을 정말 좋아했어요. 쇼윈도에 실용적이고 단정한 가방이 보이면 언제나 예쁘다고 감탄을 했어요. 그래서 아빠는 결혼기념일마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가방을 선물했어요. 제가 가방을 좋아하는 건 아마 엄마를 닮은 모양이에요. 제가 가방 디자이너로 전향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도 엄마였어요. 살아 계셨다면 가장 많이 응원해 줬을 분이니까요.”
민재에게 오늘 가방은 핑계일 뿐이었고, 처음 하는 안 하던 짓인데 수인에게는 그것이 정말 절실히 바라는 것이란 걸 알게 되는 순간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이토록 잘 자란 이수인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을 또 한 번 인정했다.
“그래서 이 가방이 교수님 어머님께 정말 좋은 선물이 되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요.”
깊어진 눈동자를 하고선 입은 웃고 있는 수인의 모습이 민재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민재는 자신도 모르게 가방을 든 손에 커피를 옮기고 비어버린 손을 수인의 머리에 올렸다. 자그마한 뒤통수가 민재의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잘 자랐네.”
낮고 담담한 민재의 목소리가 초가을 바람을 타고 잔잔하게 퍼졌다.
수인은 갑자기 자신의 뒤통수에 닿는 민재의 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민재가 자신의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고른다고 할 때, 그 조교에게 주는 선물인 줄 알았던 수인으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그리고 꽤나 진지한 얼굴로 지훈이 추천해 준 가방을 보고 있는 민재의 모습은 수인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묘한 감각을 남겼다.
저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선물을 고르는 모습은 수인이 애써 누르고 있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순식간에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그래서일까? 원래 특정 몇 명 외에 다른 친구들에겐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세세하게 하지 않던 수인이 민재에게 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평소 수인은 그저 사고로 부모님이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다, 라는 짧은 설명뿐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고 살았다. 꺼내 늘어놓을수록 아팠고, 그리웠고, 힘들었으니까. 그저 가슴 깊은 구석에 넣어두고 늘 조금은 애틋한 듯 살아왔다.
“어…… 커피 잘 마셨어요. 저 그만 가볼게요.”
갑자기 휙 돌아서는 바람에 뒤통수에 닿았던 민재의 손은 떨어져 나갔다. 수인은 자신도 모르게 허둥대듯 말을 던진 뒤, 꾸벅 인사를 하곤 빠르게 걸어 나갔다.
왜 정민재에게 이런 소리들을 한 건지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하고 싶었고, 막상 정민재 앞에서 꺼내놓으니 생각보다 아프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토닥이기라도 하듯 민재의 손이 닿았을 때, 그제야 수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민망해졌다.
친하지도 않은 교수 앞에다 대고 자신이 뭘 한 건지. 그리고 가슴은 왜 이렇게 콩닥거리는 건지. 또 뒤통수는 왜 이리 따가운 건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마치 정민재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캠퍼스를 빠져나가려고 빠르게 움직이는 수인의 발걸음만큼 가슴도 같이 뛰어댔다.
콩닥콩닥, 마치 숨이 찬 것처럼 뛰고 있는 가슴 덕에 수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전히 뒤통수는 뜨거웠고, 그것이 정민재의 시선 때문인지 아까 닿았던 손바닥의 느낌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