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씨의 인지능력이나 업무 처리 능력이 떨어진다기보다는 어떤 부분은 상대적으로 훌륭하고 어떤 부분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즉 그 편차가 크고 불균형한 상태여서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대단한 욕심을 부린 게 아닌데도 힘든 거죠.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할까?’, ‘남들은 다 잘하는데 나는 왜 안될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에 빠지게 되고요. 자꾸만 ‘나는 정상이 아니다’라는 고민을 하곤 하는데, 때마침 주의력과 집중력, 도파민 등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니 ‘내가 혹시 ADHD라서 그런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게 되죠. 정리도 잘 안되고 생산성도 떨어지고 산만하기 그지없는 나의 이런 상태가 사실은 질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질환이라 생각하면 나의 상태를 ‘교정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고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품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기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ADHD는 우리가 체감하는 것보다 실제로 진단이 덜 되고 있기 때문이죠. 의심 씨 같은 사고의 과정을 거쳐 병원을 찾고 ADHD를 진단받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 p.36, 「ADHD, 왜 이렇게 핫하죠?」 중에서
ADHD가 있는 뇌의 상황을 한번 그려볼게요. 초등학교 교실이 하나 있어요. 1반이라고 합시다. 1반에는 의욕이 넘치는 친구, 똘똘한 친구, 개구쟁이 친구들이 다양하게 모여있습니다. 그런데 1반 담임 선생님이 교탁 앞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예요. 수학 시간이라 아이들이 “구구단이 뭐예요?” 하고 묻는데 “어, 얘들아 잠깐만. 선생님이 피곤해서, 정신 좀 차리고.” 이러면서 계속 헤매고 있는 거죠. 이런 시간이 길어지면 어떤 아이는 다른 과목 교과서를 펼쳐 읽고, 어떤 아이는 공책에 낙서를 하고, 어떤 아이는 짝꿍이랑 장난을 치고, 다른 아이는 말없이 화장실에 가겠죠. 아이들을 적절히 통제하고 수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텐션이 떨어진 선생님, 이것이 ADHD가 있는 뇌의 상태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업시간은 흘러가는데, 대체 구구단은 언제 배울 수 있을까요? 오늘 진도를 완수할 수 있는 걸까요?
--- p.56, 「ADHD, 정확히 뭔가요?」 중에서
여성의 경우는 임신과 출산, 양육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ADHD를 의심하며 병원을 찾는 일이 흔합니다. “선생님, 저는 육아가 너무 안 맞아요. 아이를 키울 능력이 안 되는 것 같아요”라고 호소하는 분들이 많아요.(…) 아이한테 너무 소리를 지른다는 거예요. 물론 아이 때문에 속이 터지고 답답하면 그럴 수 있죠. 그런데 ADHD가 있는 엄마들이 겪는 감정은 그냥 신경 쓸 일이 많아져 힘들다는 것과는 결이 좀 다릅니다. ADHD가 있는 분들은 일단 평소에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도 힘들었거나, 아니면 규칙적이지 않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경우도 많거든요. 아이가 없을 때라면 밥을 좀 대충 먹거나 건너뛰어도, 청소를 좀 안 해도, 시간 약속에 좀 늦어도, 충동적으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지면 되지만 아이를 키울 때는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단순히 아이 때문에 속상하고 스트레스 받는다, 육아가 너무 피로하다 정도를 넘어서 나도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든데 애가 스스로 걷고 뛰게 만들어야 하니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밀려올 수밖에요.
--- p.75, 「언제 내 ‘문제’를 인식하게 되는 걸까?」 중에서
저는 ADHD 치료에서 약물이 하는 역할을 ‘오리발’에 비유하곤 합니다. 수영을 배우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강습용 핀, 일명 오리발이요. 오리발을 착용하고 발차기를 하면 맨발로 할 때보다 훨씬 수월하지요. 평소보다 물에 잘 뜨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편해서 수영을 배우는 강습생들이 팔 동작을 연습하거나 영법을 발전시킬 때 오리발의 도움을 받곤 합니다.
ADHD 치료 약물을 이 오리발이라고 생각해보세요.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개선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약의 도움으로 조금 더 쉽게 개선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영법이 익숙해지면 오리발이 없어도 수영을 잘할 수 있듯이, 약의 도움으로 일상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면 ADHD 약물도 줄여나가면 됩니다. 약물 치료를 하면서 일을 시작하고 동기를 유지하고 지속해나가는 것이 원활해지면, 루틴을 정리하거나 과제를 완수하는 과정을 충분히 익히고 훈련할 수 있게 됩니다. ‘주의를 기울여 집중하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감각을 직접 체감하면서 원하는 정도의 집중과 실행 수준을 조절하게 되면 약이 좀 덜 필요하다고 느낄 거예요. 이 정도면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 무리가 없겠다 싶은 수준을 주치의 선생님과 상의하여 치료 목표로 정해보세요. 그러면 어느 순간 약을 줄여나갈 수 있는, 그러니까 오리발 없이도 능숙해지는 시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p.119, 「약이라는 오리발을 끼고 혼란의 바다 건너기」 중에서
우리 뇌의 시상하부의 상교차핵이라는 곳이 일주기 리듬을 결정하는 일종의 생체 시계인데요, 어떤 사람들은 이 생체 시계가 밤에 자고 아침에 깨는 일반적인 리듬과는 다르게 설정되어 평범한 사회적 루틴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일주기 리듬 수면장애라고 부릅니다. ADHD를 가진 분들은 이 중에서도 지연성 수면 위상 증후군(Delayed Sleep Phase Syndrome)을 주로 경험합니다. 잠자는 데에 필요한 호르몬인 멜라토닌의 분비 자체가 1.5~2시간 이상 지연되어 잠들기도 어렵고, 심한 경우는 밤에 주된 활동이나 놀이를 하다가 새벽 5~6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밤중에 방해 요소가 적기 때문에 이때 집중을 요하는 일을 처리할 수 있어서 주로 밤에 작업을 하는 통에 수면 리듬이 더더욱 늦어지기도 합니다. (…) 불면증이 있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성인 ADHD 환자 네 명 중 세 명이 밤에 잠들기 위해 마음을 차단(shut-off )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고합니다. 푹 자기 위해 방의 조명 스위치는 끄지만, 뇌의 각성 스위치는 끌 수 없는 것입니다. 자려고 누워서 머리를 비우고 양이라도 세어보려 해도, 갑자기 떠오르는 그날 있었던 일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 여기서 파생된 상상 등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이런 상황을 ADHD의 “생각의 질주(racing thoughts)”라고도 표현하는데요, 평소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특히 잠들기 전에 입면을 크게 방해합니다.
--- p.129, 「ADHD의 아킬레스건, 수면이라고?」 중에서
다만 걱정이 되는 점은 요즘 같은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문화에서는 이러한 좋은 취지가 왜곡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에요. 자기계발 담론에서는 당사자가 겪어온 어려움을 모두 개인 내부의 문제나 노력 부족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성공에 대해 아는 것을 ‘변화’라 하고 자신을 변화하기 전과 후로 나눈 뒤, 변화 이후를 성공에 대해 아는 ‘계몽된 자’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살아가는 우리에겐 ADHD 진단과 치료의 ‘비포/애프터’가 마치 ‘좋은 삶’과 ‘나쁜 삶’의 대치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물론 ADHD로 일상에 불편을 겪고 힘든 시간을 보낸 환자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개선되고 편안해지는 과정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ADHD 치료 이전의 삶은 ‘이번 생은 망했어’이고 치료 이후의 삶만이 ‘갓생’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전의 나의 삶도 나의 삶이고 변화된 새로운 삶 역시 나의 삶이잖아요. 치료 이후 일상이 달라졌다고 해서 나의 정체성이나 유전자가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ADHD를 진단받고 치료하기 이전의 삶은 다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뿐, 애초에 내가 갖고 있던 가치관이나 능력, 기질, 성격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 p.188, 「자기계발 담론과 ADHD」 중에서
‘K-장녀’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의젓해야 하고, 힘든 내색을 해서는 안 되고, 부모의 양육을 보조하고, 부모를 실망시켜서는 안 되는, 소위 살림 밑천이라는 ‘한국의 큰딸’이요. 앞서 여성들은 성 역할 특성상 학교와 사회에서 정리정돈과 자기관리에 대해 더 높은 기준을 요구받는다는 얘길 했는데요, K-장녀는 이에 더해 가정에서도 어마어마한 책임과 역할을 부여받게 됩니다. 장녀 또는 장녀가 아니어도 이런 역할을 부여받은 자녀는 부모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부모의 마음을 위로하고, 부모의 책임도 일부 나누어 지게 되지요. (…) 게다가 K-장녀로서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면 더 큰 비난이 이어지기 때문에 스스로 무리하게 과교정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지요. 이는 강박적 태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나는 방심하면 실수를 하니 정신 바짝 차리고 절대 실수하지 말아야지”라며 애쓰다 보니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습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진료실에서 이런 K-장녀 환자들을 종종 마주합니다. 보통은 불안장애나 우울증 때문에 병원을 찾는데, 상담을 이어가며 자세히 관찰해보면 근본적인 원인이 ADHD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되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경우 진단에 다다르기도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분들은 어릴 때부터 단련된 책임감과 배려, 각고의 노력으로 본인의 증상을 여간해서는 드러내지 않거든요.
--- p.200, 「마음 놓고 산만하지도 못한 K-장녀」 중에서
ADHD가 나아지면 일상의 많은 부분들이 이전보다 수월하게 흐르고 스트레스 관리도 조금은 쉬워지겠지만, 그게 곧 내 인생이 나아질 거라는 보장으로 이어지나? 나는 저분들처럼 뛰어나게 잘하거나 성취를 이뤘다고 할 만한 분야가 없는데, ADHD가 치료되면 나는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일까? 그냥 썩은 쓰레기에서 일반 쓰레기가 되는 것 아닐까?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제 겨우 몇 주 약 먹었는데 벌써 이런 걱정부터 하고 있다니 나도 진짜 못말린다 싶어요.
그래도 일단은 좋아요. 특출난 능력은 없지만 약물 치료 덕분에 적어도 기본은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요. 시간을 지키는 것,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하는 것, 잠을 잘 자는 것, 방을 치우는 것, 물질 사용 중독들에서 벗어나는 것. 무릇 인간이라면 하고 살아야 하는 것들을 사람답게 할 수 있겠지. 우선 지금은 그런 생각으로 살아요.
--- p.304, 「ADHD 환자의 이야기 4, 환자Y」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