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임오군란 이후 일본의 조선정책은 이른바 ‘소극정책’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강화도조약을 내세워 조청 간 상하관계를 부정하고 조선을 독립국으로 간주하지만, 실제로는 청국의 한반도 정책에 소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긴장의 고조를 회피하는 정책을 의미한다(자료 10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의 ‘소극정책’은 거문도사건을 계기로 ‘대청 협조주의’로 발전했다. 즉, 영국이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에 대한 간섭 및 사실상의 관리 권한을 청국에 위임하자, 일본 또한 이를 추종한 것이다.
--- p.63~64
일본이 조선을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은 청일전쟁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중국 정세가 불안하니 이 틈에 한반도의 요충지를 군사점령하자는 발상은 외교관으로서는 보기 힘든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하야시 공사는 이후 인천을 군사적으로 점거하는 것이 어려우면 남해안의 거제도를 점령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냐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하야시 공사의 과격한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지만 만주와 접하고 있는 한반도의 안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모스크바 주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공사는 러시아가 군사적인 만주 점령으로 한반도를 크게 압박하는 위기를 신속하게 타개해야 한다는 공문을 올렸다.
--- p.99~100
연합국과 독일의 평화조약인 베르사유조약은 국제연맹규약을 포섭함으로써 베르사유체제를 형성했다. 주요 이념은 민족자결이었지만, 결국 이는 일부 국가들에만 적용되었고, 국제연맹을 통해 국가 간 관계의 재규정에 무게를 두었다. 국제연맹규약 제10조 집단안보체제는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한편, 제21조 지역적 양해를 규정함으로써 국제주의 속에서 지역주의를 허용했다. 베르사유체제의 탄생에 따라 패전국들의 식민지는 해체되었고, 이후 식민지 획득 역시 금지되었다. 그러나 전승국인 강대국들의 기존 식민지 보유는 지속되었다. 베르사유체제는 일본의 한국 통치를 추인했다. 국제주의와 제국주의가 혼재된 상태에서 거대 체제가 탄생했다.
--- p.149~150
이제 유럽에서 발발한 세계대전은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에 대해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미국과 영국의 글로벌 대결로 확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의 대서양헌장이 발표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9월 6일, 일본은 히로히토 천황도 직접 참가한 어전회의를 개최하고,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과 전쟁을 수행한다는 개전 방침을 논의하였다. 이 방안은 육군과 해군이 준비한 것으로 일본 군부에서는 일본이 하와이의 미 태평양함대를 선제기습 공격하고, 동남아 지역의 필리핀,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을 동시에 공격할 경우 초전에 승산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 p.191
한국인들의 역사관을 지배하는 것은 근대의 한국 사관입니다. 이러한 근대 한국사관의 두드러진 특성이 외세의 침략과 지배에 대한 한국인들의 강한 저항이었습니다. 다행히 요즘 한국인을 주어로 놓는 연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략) 한국인을 주어로 역사를 보고, 한국의 근대사에 대한 성찰도 한국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잘못된 판단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는 역사를 다시 구축해야 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 p.204
1953년에 탄생한 한반도 정전체제는 조선인민군의 재침 봉쇄 외에 한국군의 북진 봉쇄, 그리고 일본의 재무장 봉쇄라는 3중 봉쇄체제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포함한 한반도 정전체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중화민국과 미국 공동방어 조약이 지닌 이중 봉쇄적 성격과 유사하면서도 더 복합적인 성격의 봉쇄체제였다. 한반도 정전체제는 아시아-태평양 냉전체제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중략) 1953년 8월에 가조인되고, 1954년 11월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 정전체제의 한 축을 형성하면서 정전협정과 함께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오래된 정전’을 지탱해 오고 있다.
--- p.271
결국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과 평화조약은 미국 주도로 연합국과 일본이 맺은 평화조약이었으며, 냉전 반공 조약의 성격이 강했다. 일본은 연합국들과 평화와 안보를 교환했으나, 동아시아 국가들은 배제되었다. 역설적으로 전쟁 시기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받았던 동아시아 국가들은 전쟁과 분단 등을 이유로 배제되었고,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이 일본을 패전의 책임으로부터 구원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은 전후 미국 주도의 동북아시아 질서를 형성했지만, 전쟁책임, 식민지, 과거사, 영토 문제 관련 미해결의 유산을 남겼다. 한국은 회담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은 한일관계, 한일회담의 기본 룰을 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 p.310
한국전쟁은 한민족에게 커다란 비극이었지만 동아시아와 세계적 차원의 냉전을 수행하는 기본 구도와 방향을 설정한 중요한 전쟁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기존의 외교적·경제적 방법에 의한 대소 봉쇄를 본격적으로 군사적 봉쇄로 변화시켰다. 미국의 국방비가 3배로 증가하였고 동아시아의 동맹이 본격적으로 결성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바큇살 동맹 네트워크는 현재까지 큰 힘을 발휘하며 지탱되어 오고 있다. 한편 한국 역시 북한과 정전협정 수립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축으로 미국과 동맹 관계를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한미동맹은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지역의 자유주의 안보질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현재 미중 전략경쟁 구도 속에서 지난 70년간의 안보질서는 점차 변화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동맹체제는 중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다층적 안보 제도로 바뀌어 가고 있으며, 한국은 이에 어떻게 대처할지 지혜를 모아야 하는 시점이다.
--- p.341~342
한미 관계는 안보라는 공통의 이해관계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방안과 관련하여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발생했다. 1950년대에 가장 중요한 갈등은 미국 정부의 주한미군 및 한국군 감축정책과 한국 정부의 환율정책, 그리고 한일 관계의 정상화를 둘러싸고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는 원조를 매개로 했던 1950년대 한미 관계와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반일 이데올로 기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도 주한미군 및 한국군 감축정책이 지속적인 갈등 요소가 되었고, 이 문제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결정에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환율 문제와 한일 관계정상화는 1960년대를 통해 더 이상 중심적인 이슈가 되지 않았지만, 한국 정부의 경제부흥 정책과 함께 1960년대 후반 남북 관계 및 미국의 베트남 정책 변화는 한미 관계에 또 다른 갈등 이슈가 되었다.
--- p.345~346
일본은 한국전쟁 전 과정에 걸쳐 미군(연합군)이 한반도에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 그것은 출격,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였으며, 병사와 물자 수송을 위한 중계기지이기도 했으며, 수리·조달을 위한 보급기지이자 훈련 휴양을 위한 후방기지였다.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병참기지(logistic base)’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중략) 한국전쟁 전 기간에 걸쳐 출격기지를 포함해 일본 전국 730여 개의 미군기지가 한반도 전쟁에 편입되어 있었다. ‘기지국가’ 일본은 별도의 ‘참전’이 필요 없이, 존재 그 자체로 전쟁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행위자였다. 아직 국제법상의 ‘국가’가 아니었기에 ‘참전국’이 아니었을 뿐이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이들 기지를 고스란히 안고 일본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으로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같은 날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은 미국이 일본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일본이 미국에 기지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 p.381~38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한반도를 38도선을 중심으로 분할하는 안을 만들었고, 38도선 이남을 점령하였지만 미국의 대한 정책은 기본적으로 소극적·방어적 성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 미국이 38도선을 확정하면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군사적 목적 외에 정치적 목적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소련의 팽창을 견제한다는 방어적인 것이었죠. 당시 소련도 일본 등 다른 지역에서의 이권 획득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무리하게 영향력을 확대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였고요. 이와 같은 미·소의 한반도에 대한 소극적 태도는 한반도가 분단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1950년 1월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제시하며 한국을 제외하였는데요, 애치슨 라인은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대해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사실임을 보여 줍니다.
--- p.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