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것은 성경 해석자들이 다뤄야만 하는 주제 중 좀 더 어려운 주제다. 신자들이 다니엘 2장이나 요한계시록 20장 같은 구절들에 대해 자신의 해석을 제시할 때 그 문제가 예리해진다. 이런 텍스트들을 인간 역사의 흐름과 관련지으려는 시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의 통치를 설명하는 몇 가지 시스템을 만들어냈는데, 그것들 세 가지에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이 범주들은 유익하고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어떤 면에서는 유감스러운 구분이다. 그 구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와 좀 더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전천년주의자들이 고대하는 왕국은 후천년주의자들이 고대하는 왕국과 판이하다. 차이는 그 왕국이 수립될 시기와 방식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 왕국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제 행사의 본질과 방식에 관해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그 견해들을 자세히 정의함으로써 그 견해들과 그 함의들을 이해할 수 있다.
--- 「서론」 중에서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도래할 시대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구속 목적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기 전에 그가 땅에서 1,000년 동안 다스리실 것이라고 진술하는 교리다. 이는 요한계시록 20:1-6의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요한계시록 19:11-16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정복자가 자신의 적들, 곧 적그리스도와 사탄과 죽음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는 것으로 묘사한다. 요한계시록 19:17-21은 먼저 적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반대하여 그를 지원한 무리들의 멸망을 묘사한다. 요한계시록 20장은 이어서 적그리스도 배후에 있는 악한 힘,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인 용의 멸망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두 단계로 일어난다. 우선, 사탄이 적그리스도를 통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결박되어 “무저갱”(계 20:1)에 감금된다(계 20:3). 이때 성도들의 “첫째 부활”이 일어나(계 20:5) 그리스도가 이 땅을 1,000년 동안 통치하시는 데 참여한다. 이 일 후에 사탄이 결박에서 풀려나고, 사탄은 그리스도가 이 땅을 1,000년 동안 다스리셨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반역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발견한다. 최후의 종말론적 전쟁이 뒤따르고 마귀가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진다. 그때 천년왕국 전에 부활하지 않은 사람들의 둘째 부활이 일어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나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그때 사망과 무덤이 불 못에 던져진다.
--- 「1장 역사적 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중에서
핵심적인 현안에 초점을 맞추면서 래드는 “세대주의는 구약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의해 종말론을 형성하고 신약성경을 그것에 맞춘다. 비세대주의 종말론은 신약성경의 명시적인 가르침을 통해 종말론을 형성한다”라고 단언한다(본서의 38쪽을 보라). 내가 판단하기에 이것은 사실에 대한 공정한 진술이 아니다. 세대주의자는 구약성경에 비추어 신약성경을 해석하는 반면 비세대주의자는 구약성경에서 도출된 것이 아닌 해석 체계를 통해 신약성경에 접근하고 이를 신약성경에 부과하는 것으로 보인다. 래드가 “(a) 그리스도의 초림은 구약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통해 예견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성취되었고, (b) 구약성경의 약속들이 기독교 교회에서 성취되었다는 피할 수 없는 징후들이 있다”고 단언할때(본서의 38쪽을 보라) 그의 말은 무천년설처럼 들릴 뿐만 아니라 무천년설과 아주 가깝다. 이 지적을 피하기 위해 그는 교회가 명확히 이스라엘과 구분되는 로마서 11장 같은 구절들을 해석할 때 영적 해석에서 문자적 해석으로 이동할 필요를 느낀다.
--- 「1장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래드는 “천년왕국 교리는 구약성경의 예언들에 근거할 수 없고 신약성경에만 근거해야 한다”는 것과 “성경에서 실제로 천년왕국에 관해 말하는 곳은 요한계시록 20:1-6뿐이다”라는 것을 인정한다(본서의 44쪽을 보라). 그는 “그리스도는 현재 하나님의 섭정으로서 하늘에서 다스리고 계신다”라고 말한다(본서의 41쪽을 보라). 그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하는 히브리서 1:3을 인용하고 그리스도가 이제 힘과 탁월함의 자리인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말한다. 시편 110:1의 성취로서 그리스도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판이 될 때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실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그리스도가 “지금 주님이시다. 그가 지금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나 그의 현재의 통치는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보인다. 그것은 세상에게는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다. 그의 두 번째 도래는 이미 그분의 것인 주권을 드러내는 것, 즉 계시를 의미할 것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실 무천년주의자나 후천년주의자가 이렇게 썼더라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천년주의자로서 나는 교회 시대 동안 세상이 의로워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그 통치의 결과가 강조되지 않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 「1장 역사적 전천년설: 후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우리의 기본적인 의견 불일치는 요한계시록 20:1-6의 해석과 관련된다. 나는 래드가 이 구절이 성경에서 천년왕국에 관해 말하는 유일한 곳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보고 반가웠다(본서의 44쪽을 보라). 이 점에 관해서도 우리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 「1장 역사적 전천년설: 무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그것은 그 단어의 모든 의미에서 문자적인 왕국일 것이다. 이 왕국은 인간이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지상의 여느 왕국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이스라엘 왕국만큼이나 실제적일 것이다. 그것의 중심지의 실제 장소는 예루살렘과 그 인근일 것이다(옵 12-21절). 실제 왕이 물리적인 왕좌에 앉을 것이다(사 33:17). 인간의 나라들이 그 왕국의 복지와 구원의 사역에 참여할 것이다(사 52: 10). 이 세상의 사악한 왕국들은 그리스도가 도래하실 때 갑작스럽고 재앙적인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그 왕국들을 대신할 것이다(단 2:31-45). 이 왕국은 역사적 다윗 왕국의 부활이자 연속일 것이다(암 9:11; 행 15:16-18을 보라). 신실하고 거듭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회복되고 이 왕국의 핵심이 될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신 언약이 실현될 것이다(미 4:7-8; 렘33:15-22; 시 89:3-4, 34-37). 예루살렘은 위대한 왕의 수도가 되고 그는 그곳에서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사 2:3; 24:23).
--- 「2장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중에서
호이트는 천년왕국이 유대인의 왕국이라는, 세대주의에서 두드러진 중요한 점 한 가지를 경시한다. 그가 “이 왕국은 역사적 다윗 왕국의 부활이자 연속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본서의 98쪽을 보라), 그는 이것이 성전의 재건과 구약성경의 전체 제의 및 끝없는 피 제사의 사이클을 의미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약 시대의 제의로 돌아가는 것은 히브리서 8:13에 의해 불가능해졌다.
--- 「2장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사실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거절당하셨을 때 그분은 배교한 유대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을 폐하시고 일련의 새로운 관리들인 사도들을 임명하셨으며, 그들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다. 한번은 그가 유대인 통치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21:43). 그리고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교회가 세워진 후에도 계속 교회를 반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이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다”(살전 2:16)라고 엄숙하게 말하는 상태에 들어갔다. 그것은 미래의 민족적인 개종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제 새 언약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권위 있는 도구다. 나는 언약들에 관한 성경의 이 교리가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모두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과 양립할 수 있다.
--- 「2장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후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중요한 문제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건전한 성경 해석 방법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인데,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다. 실제로 호이트의 논문을 떠받치는 기본적인 해석 원칙은 “구약성경이 신약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열쇠를 제공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호이트는 장차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자기 주장의 근거를 주로 구약성경 예언들에 두고, 나아가 이러한 구약성경 예언들의 문자적 해석에 비추어 신약성경을 해석한다. 그러나 그는 믿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믿는 비이스라엘의 미래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한다.
--- 「2장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무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후천년설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복음 전도와 개인들의 마음속에서의 성령의 구원 사역을 통해 세상에서 확장되고 있다는 것과 세상이 궁극적으로 기독교화되리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은 흔히 천년왕국이라 불리는 의(righteousness)와 평화의 긴 기간 끝에 일어나리라는 것을 주장하는, 마지막 일들에 관한 관점이다. 후천년설의 원칙에 그리스도의 재림 직후 일반적 부활, 일반적 심판, 천국과 지옥이 완전히 도래하는 일이 후속되리라는 점이 덧붙여져야 한다. 후천년주의자들이 고대하는 천년왕국은 따라서 현재 시대(dispensation), 즉 교회 시대 동안의 영적 번영의 황금시대다. 이것은 현재 세상에서 활동 중인 세력들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매우 긴 기간, 아마도 문자적인 1,000년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계속될 것이다. 개인들의 특성이 변하여 인류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삶이 향상될 것이다. 그때 세상은 대체로 지금까지는 예를 들어 몇몇 가족과 몇몇 교회 및 유사 조직 같은 소수의 격리된 집단에서만 발견된 의의 상태를 누릴 것이다.
--- 「3장 후천년설: 후천년설」 중에서
세상이 점점 나아진다는 주장은 양날의 칼이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주장도 똑같이 타당하다. 신약성경 시대에 문명은 위대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누렸다. 당시에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 동안 평화로웠다. 이런 시기는 결코 반복되지 않았다. 우리의 생애에 우리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대한민국, 베트남, 근동, 아일랜드, 레바논 등에서 일어난 끊임 없는 일련의 좀 더 작은 규모의 전쟁을 목격했다. 우리는 나치주의가 발흥해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것과 파시즘의 발흥과 몰락, 공산주의 정부의 발흥과 안정화를 목격했다. 오늘날 세상은 말 그대로 무장한 캠프다. 뵈트너는 전천년설을 세대주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내가 쓴 장이 보여준 바와 같이 나는 뵈트너가 “전천년주의자들”에게 귀속시키는 문자주의적 주해를 추구하지 않는다.
--- 「3장 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아마도 우리가 언제 또는 어떤 단계에서 이 왕국이 실제로 실현된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뵈트너는 이것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모든 죄가 근절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많은 형태의 모든 악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축소될 것이고 기독교의 원칙들이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과 일치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지금 어떤 증거라도 보고 있는가?
--- 「3장 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하지만 혹자가 세상이 실제로 나아지고 있다는 뵈트너의 말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어떻게 세상이 1,000년 동안의 황금시대를 향해 움직이고 있음을 증명하는가? 인류의 운명이 갑자기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의 시대 다음에 새로운 암흑시대가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 뵈트너의 논문에서 배교(또는 “신앙의 포기”), 대환난,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은 당황스럽다. 누가복음 18:8에 기록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예수의 말씀에 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런 말씀들은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때 참된 신자들의 수가 참으로 적을 수 있음을 암시하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 전에 우리는 기독교화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뵈트너의 주장(155쪽을 보라)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 「3장 후천년설: 무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내게 가장 만족스러워 보이는 요한계시록의 해석 체계(그 체계에도 어려움이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는 점진적 병행(progressive parallelism)으로 알려진 체계인데, 이 체계는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의 요한계시록 주석인 『정복자들 이상』(More Than Conquerors)에서 훌륭하게 방어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은 서로 병행하여 전개되는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그 부분들 각각은 그리스도의 초림 시부터 재림 시까지의 교회와 세상을 묘사한다.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인 숫자들로 가득하다. 확실히 이 책에서 사용된 “1,000”이라는 수는 문자적 의미로 해석되지 않아야 한다. 숫자 10은 완전함을 나타내고 1,000은 10의 세제곱이기 때문에 우리는 “1,000년”이라는 표현을 완전한 기간, 즉 확정되지 않은 매우 오랜 기간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구조에 관해 앞서 언급된 내용과 일치하도록, 그리고 요한계시록 20:7-15(사탄의 “짧은 시절”과 최후의 전쟁 및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다)에 비추어 우리가 1,000년의 기간이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시작하여 그의 재림 직전까지 이어진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 「4장 무천년설: 무천년설」 중에서
나는 그의 요한계시록 20장 주해를 제외하고 후크마가 쓴 내용의 사실상 모든 부분에 동의한다. 나는 마태복음 12:29이 예수의 지상 사역이 하나님 나라가 역사 안으로 침투한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사탄의 결박을 의미한다고 명확히 가르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 결박은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된 사탄의 결박과 다르다. 전자는 사탄의 힘이 분쇄되어 남녀 개인들이 그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후자는 그가 민족들을 더 이상 속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을 보았다는 사실이 그 장면이 하늘의 장면임을 증명하지 않는다. 사실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요한이 언제 하늘에 있고 언제 땅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요한은 명확하게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함으로써(계 20:1) 그 장면이 하늘에서 땅으로 전환되었음을 단언한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서”라는 진술(계 20:4)이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면 그 장면은 땅이다.
--- 「4장 무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후크마가 정직하게 인정하듯이 요한계시록을 다루는 이 방법이 그에게는 가장 만족스러워 보이지만 이 방법에도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미래주의의 함의를 제거하고 그의 체계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문자주의를 피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는 요한계시록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 추론이 학문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어려움들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는다. 요한계시록이 묵시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책이 모호해지지 않는다. 묵시적인 제시 방법은 그 책을 한층 더 생생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성경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이 이미지는 평균적인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이 책에서 비유적인 내용은 많은 사람이 원하는 수준보다 훨씬 적다. 평균적인 사람들에게 천년왕국을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은 인간의 정신으로 하여금 텍스트에 나오지 않는 뭔가에 동의하도록 요구하는 처사다. 그보다 더 심각한 요소로서, 혹자가 일곱 부분이 같은 시기(초림과 재림 사이)를 다루게 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 사람은 그것의 타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혼동에 직면할 것이다. 이것은 무천년설의 견고한 기초를 세우기에는 허약한 토대다.
--- 「4장 무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이 역사적 전천년설이나 세대주의와 비교될 경우 후천년설과 무천년설 사이에는 비교적 별로 차이가 없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후천년설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 복음 선포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확대되고 있으며, 세상이 궁극적으로 기독교화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오랜 의와 평화의 기간 끝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천년설은 성경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그런 의와 평화의 기간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지 않는다는 것과 선과 악,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병행하여 동시에 발전하기를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하리라는 것을 주장한다. 후천년설과 무천년설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 후 즉시 부활과 심판 및 영원한 상태가 이어지리라고 주장한다.
--- 「4장 무천년설: 후천년설의 응답」 중에서
전천년설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교회를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진하는 기관으로만 본다. 비관적인 세계관을 증진하기 위해 고강도의 압박 전술이 사용되며 그리스도가 돌아오시도록 “마지막 영혼을 얻는 것”이 강조된다.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은 교회를 사교 클럽으로 취급하는 반면 근본주의 회중들은 주님을 위한 선전에 관여하는 대항문화 집단을 만들려고 노력함으로써 과녁을 놓친다.) 이 두 태도와 대조적으로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어 사람을 온전해지게 만들 뿐만 아니라 구성원들을 계속 돌보기도 하는 치유 공동체로 묘사한다. 이 관심은 모든 분야의 인간의 필요를 돕는 데 미친다. 따라서 무천년주의자들과 후천년주의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대의 또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다른 많은 전천년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많이 이해한다. 후천년설은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진정한 부흥이 오고 그들을 통해 인간의 모든 제도에 치유하는 영향을 행사할 가능성을 연다.
--- 「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