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더 중요하다. 행복이나 근심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똑같이 다가오려 하는데, 행복을 보고 끌어안는 사람도 있고, 습관이 되어 슬픔이나 근심을 먼저 보고 끌어안는 사람도 있다. 지금이라도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사는 데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성실’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겸손’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진정성’이라고 한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예의’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조금이라도 낮추는 일, 그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다산 정약용의 좌우명이 잘 말해 준다. “겨울 냇물을 건너듯 네 이웃을 두려워하라.” 가슴에 새기고 새기며 살아야겠다.
“거짓말을 한 그 순간부터 뛰어난 기억력이 필요하게 된다.” 프랑스 극작가 코르네이유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고, 속는 사람도 베어도 베어도 자라나는 부추처럼 계속 나온다. 속는 놈 있으니 속이는 놈 있다. 바꿔 말하면, 속이는 놈 있으니 속는 놈 있다. 그게 인류의 역사라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래서 예로부터 선지자들은 사람 사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다. 한 치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길이다. “길에서 길을 묻고, 물에서 물을 묻고, 마음 안에서 마음을 묻는다.” 이 말 밖에 달리 정답이 없다.
화를 잘 내는 것도 습관이다. 사람이 평생 화를 안 내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 화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화가 나면 그 화에 정신을 송두리째 맡겨 갈 데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이 화가 난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내가 또 화를 내는구나’ 하고 잠깐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면 화를 조절할 여유가 생기고, 나중에는 굳이 화를 내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 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돈, 건강, 명예 등 그 무엇을 갖지 못했을 때의 ‘결핍’과 그 무엇을 갖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한 사실, 또 그 일을 이루고 싶은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결핍과 욕망으로 인해 우울과 낙담에 빠지고 불행을 느낀다. 특히 우울할 때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회색빛으로 보인다.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그나마 안쓰럽게 여기던 자기 자신까지도 경멸스럽게 바라본다. 사람이 우울한 것은 정말 바람 직하지 않다. 우울한 사람은 어쩌면 자기 내면에 파고들어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스스로를 난도질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과 불행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내가 가꾸고 이룩한 것이 참 기쁨을 주지, 누군가가 나에게 증여한 것은 아무리 값어치가 클지라도 나에게 맞춤복이 아닌 기성품에 불과하다. “세상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은 이기적인 병이다. 이러한 사람은 행복을 소비할 것만 생각하고 생산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버나드 쇼도 이렇게 말했다.
너무 늦기 전에 제대로 보라. 모든 사람이 본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사태를 너무 늦게 알아차리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걱정만 키울 뿐이다. 어떤 사람은 더 이상 볼 것이 없을 때 비로소 보기 시작하고, 그런 자신을 알아차리기 전에 집과 일자리를 잃고 만다. 의지력이 없는 사람들은 분별력을 갖기 어렵고, 분별력 없는 사람들이 의지력을 갖기는 더 어렵다. 사람들은 장님 같은 그들을 둘러싸고 조롱하지만, 그들은 충고를 듣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보려고 눈을 뜨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좌우하는 그런 무감각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기수가 장님인 경주마는 불행하다. 그 말은 날렵한 경주마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을 보는 지혜》에 실린 글이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딱히 내놓을 게 없다. 누구나 잘 걷는데,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걸을 뿐이다. 달리 잘하는 것이 없다. 그런 내가 뭐라도 아는 것처럼 가끔 타인 앞에 나섰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는 생각에 부끄러워 잠을 설친 적도 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이다. 쇼펜하우어가 이 시대에 살면서 그 같은 말을 했다면 여기저기서 책잡혔을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구절구절이 옳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주저주저하게 만드는 이 시대도 정상이 아니지만, 거듭거듭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살아갈 일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 타인에 게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들보 같은 큰 허물은 보지 못하고 겨자씨처럼 작은 타인의 허물을 들춘다면, 세상에 그 같은 어리석은 짓도 없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명예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행복은 마음의 편안함과 만족에 달려 있는 것이지 명예를 얻으려고 욕심을 부리다가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며 오히려 불행해진다.
그는 행복해지려면 명예욕을 낮추라고 한다. 명성 또한 인간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존심과 허영을 위한 매우 진귀하고 맛있는 음식에 불과하며,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나 무가치가 결정된다면 인간의 삶은 비참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 명예와 명성은 쇼펜하우어가 행복의 원천으로 꼽은 세 가지 부류, 즉 ‘인간을 이루는 것’, ‘인간이 지닌 것’,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 중 자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 비쳐 평가 받는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에 속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 책을 스승으로 삼아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스위스 앵가딘 지방의 실스마리아 호숫가를 거닐다가 자라투스트라가 다가옴을 느꼈다.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처럼 독특한 철학자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한순간이나 사건이 인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책을 만나기도 하고, 그리고 어떤 절경을 만나기도 한다. 바로 그 순간이 지나온 어느 세 월에서도 접하지 못한 어떤 영감이나 환희의 불길을 활활 솟구치게 하기도 하고 새로운 돌파구가 되기도 한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인생을 지금껏 살아온 것하고는 아주 다르게, 아니 혁명처럼 작용하게 하는 것이 인연이다. 그래 헤르만 헤세는 “인연을 아는 것은 사고요, 사고를 통해서만 감각이 살아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나 모든 사물과의 인연은 다 운명적이며 필연적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꽃은 피는 것만으로 의의가 있다는 조지훈 시인의 말과 같이 한 사람의 우주와 다른 사람의 우주가 만나 사랑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의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 “내일 일은 귀신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내일을 근심하지 말고 오늘을 잘 살자. 그리고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는 임제선사의 말과 같이 오늘, 바로 지금 사랑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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