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본서의 동기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청중은 설교 홍수 시대에서 사는 데도 ‘맑은 물’, 즉 ‘참 말씀’에 목말라하고 있어서 그들에게 생명수와 같은 적실한 설교가 필요하다.”라는 데 있다. 필자는 오늘의 청중이 설교 홍수 시대에서 살면서도 목말라하는 그 원인을 찾고, 그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영화에서만 보았던 세상을 현실로 맞고 있다. 세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는 역사적 전례가 없는데, 선형 속도가 아닌 기하급수적 속도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변화는 사회 전반에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 도전 앞에서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세상은 물론이고 교회도 그 도전에 슬기롭게 응전하지 못하면 위기를 만날 것이다. 이런 현실은 우리가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없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제4차 산업혁명이 있다. 그러면 제4차 산업혁명은 이 시대에 어떻게 도전하는가? 제4차 산업혁명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과거 산업혁명은 일종의 기술혁명이었다. 하지만 제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육체를 대신하는 기술혁명이 아니라, 지능을 대신하는 혁명이다. 왜냐하면 제4차 산업혁명은 인간 본질 문제인 죽음 문제와 영혼의 문제까지 다루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있다.
따라서 제4차 산업혁명은 우리의 행동양식뿐만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간의 정체성에 도전하고 있다. 그 점에서 과거의 산업혁명과는 그 폭과 깊이가 완전히 다르다. 폭과 깊이(Breadth and depth)는 디지털 혁명을 기반으로 하여 전례 없는 패러다임 전환을 이끄는 여러 기술을 결합한다. 일하는 ‘무엇(what)’과 ‘방법(how)’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who)’인지도 변화시키고 있다. “이번은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라는 말이 적확하다. 제4차 산업혁명은 과학 기술적 측면에서 ‘모바일 인터넷(Mobile Internet)’, ‘클라우드 기술(Cloud Technic)’ 광대한 네트워크를 통하여 접근할 수 있는 가상화된 서버와 서버에서 작동하는 프로그램과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는 IT 환경을 의미한다. ‘빅 데이터(Big Data)’, ‘사물인터넷(IoT)’, 그리고 ‘인공지능(AI)’ 등의 발전을 통하여 최고의 편리성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우리 사회는 ‘초연결성(Hyper-Connected)’, ‘초지능화(Hyper-Intelligent)’의 특성을 이미 만나고 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의 강력한 연결 속에서 살고있다.
한편 제4차 산업혁명의 역기능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현대인은 ‘초연결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실제 대인 관계에서는 철저한 소외를 경험한다. 현대인은 우울감, 소외감 등 각종 정신적 질환에 시달린다. 그뿐만 아니라, 청년 대학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수면장애나 자살 충동을 겪기도 한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은 인간의 윤리와 영혼 문제에서 가치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그래서 무엇을 인간이라고 할 것인지, 어디까지 타협하고 나아갈 것인지’에 관해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 본질의 혼란은 기독교 인간관의 혼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도전은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는 이 도전 앞에서 어떻게 응전해야 하는가? 교회는 하나님께 속해 있지만, 세상 가운데 놓여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세상을 변혁해야 할 주체이다. 우리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전 앞에서 인간 존재와 하나님 나라의 참모습, 그리고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새롭게 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교회 본질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그 본질 중 하나는 설교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설교가 교회에서 살아 있을 때 영혼 구원을 활발하게 했다. 교회는 역동성을 발휘하여 세상을 변혁하는 ‘대안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로 우뚝 섰다. 그 점에서 교회는 설교에서 시작하고, 설교를 통해 자란다.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과거 한국교회는 ‘설교의 영광(the glory of preaching)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오늘의 설교 현실은 어떠한가? 필자는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와 설교 본문의 주파수가 일치하지 않고, 설교 본문과 청중의 삶과도 주파수가 일치하지 않는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원인의 핵심을 두 가지로 진단한다.
첫째는, 설교자가 설교 본문을 깊이 있게 석의하지 못한 데 있다. 그 결과 성경 본문이 주는 하나님의 대안적 음성(alternative voice)을 듣지 못했다. 성경 본문에서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메시지 대신에 설교자 삶의 이야기가 메시지의 자리로 올라왔다. 성경 본문을 석의하지 못하니 비성경적, 비신학적 설교를 하고 있다. 설교는 성경적 설교보다는 ‘종교적 담론(a religious talk)’ 필자는 ‘종교적 담론’을 설교자가 설교 본문을 깊이 있게 석의하지 않고 자신의 묵상에 기초하여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전달하는 형태로 규정한다. 둘째는, 청중의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설교는 성경 본문을 ‘석의’라는 해석 작업을 거쳐서 청중 삶의 자리에 맞는 주파수로 파고들어야 한다. 그런데 설교자가 성경 본문에 대한 이해도 청중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니 그 주파수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설교자와 청중은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설교자는 청중과 메시지를 함께 나누지 못하고 강단에서 내려온다. 그때 설교자는 당혹감과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본서는 분문과 설교, 설교와 청중의 삶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오늘의 설교는 이 둘을 충족시키는 점에서 문제의식도 약하고, 그런 시도도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본문과 청중 모두를 충족시키지 않고서는 청중이 감동하지도 변화하지도 않는다. 본문과 청중 사이의 커다란 간격을 메꿀 때, 즉 두 주파수가 일치할 때 오늘의 청중이 변하고, 교회 공동체가 세상을 변혁하는 대안 공동체로 자랄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오늘의 청중에게 적실한 설교가 무엇인지를 찾는 일에 힘써야 한다. 필자는 그 적실한 설교를 설교 역사에서 나타났던 설교의 장점과 한계를 연구하여 그 장점을 살리는 상호협력적 설교에서 대안을 찾고자 한다. 상호협력적 설교란 본문을 살리는 설교이면서 청중을 살리는 설교이다. 그리고 예수의 정체성과 교회 공동체성을 살리는 설교이다. 상호협력적 설교야말로 오늘의 청중, 즉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사는 청중에게 적실한 설교이다. 교회에서 설교가 청중의 삶에서 역동성을 잃으면 교회의 역동성도 기대할 수 없다. 교회에서 설교가 생명력을 잃으면 소외감과 불안으로 시달리는 오늘의 청중을 구원할 수 없다. 교회가 세상의 도전 앞에서 제대로 응전할 수 없다. 하지만 교회에서 설교가 살아 있으면 도전 앞에서 응전할 수 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전 앞에서 인간 존재의 정체성 혼란을 겪는 오늘의 청중을 구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는 세상을 변혁할 힘을 품을 수 있다. 따라서 제4차 산업혁명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설교로 응전해야 한다. 필자는 본서의 동기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사는 청중은 설교 홍수 시대에서 사는 데도 ‘맑은 물’, 즉 ‘참 말씀’에 목말라하고 있어서 그들에게 생명수와 같은 적실한 설교가 필요하다.”라는 데 있다고 밝혔다. 본서의 목적은 이 동기에서 시작한다.
--- 「들어가면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