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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 초판 한정 작가 사인 인쇄본, 양장 ] 위픽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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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2월 2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00쪽 | 288g | 100*180*22mm
ISBN13 9791171717002
ISBN10 1171717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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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마허는 재호가 개발한 완전자율주행 인공지능의 이름이었다. 운전자 없이 주행도 하고 주차도 하는 완전자율주행 자동차 개발은 많은 회사가 오래전부터 시도해온 것이지만, 상용화 단계까지 성공한 건 재호의 회사가 최초였다. 업계에서는 즉각 경탄과 찬사를 보내며 성과를 조명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닥 놀라워하지 않았다. 슈마허가 경이로운 주행과 주차 능력을 보이고 외부 환경에 맞춰 내부 온습도뿐 아니라 조명까지 조절해주는 시연 영상에도 이제 인공지능이라면 이쯤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들이었다.
--- p.5-6

각자에게 하나씩 있을, 자기 젊음을 용광로에 녹여 한 숨 한 숨 불어 만들어낸 맑고 얇은 유리병 같은 것, 그게 재호에겐 슈마허였다.

반면 회사 대표이자 재호와 함께 회사를 세운 세희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감사 기도라도 올리고 싶을 만큼 다행스러웠다. 슈마허가 대체할 수많은 일자리, 이후에 시작될 광범위하고 중장기적인 변화를 생각하면 이처럼 무난하고 조용한 시장 진입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 p.9

재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친 기술자라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운전을 잘하는 사람도 그렇게 되기까지 시행착오를 거치기 마련이었다. 슈마허가 충분한 데이터를 학습해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지면 발생하는 효용 역시 한두 사람이 운전을 잘하게 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차가 필요하지만 운전은 할 수 없는 수많은 장애인, 노인과 아이들에게도 선택지가 생기는 것이었다. 끔찍하지만 실은 사람이냐, 인공지능이냐는 주체만 다를 뿐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인간이 뭔가를 배우고 개선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었다.
--- p.15

세희는 씁쓸히 웃었다. 아무도 길고양이 때문에 다치고 싶어 하지 않아. 비싼 차를 전봇대에 처박아 폐차시키고 싶어 하지도 않고. 차라리 잠깐 기분이 더러워지는 게 낫다고 여기지. 어쩌면 사람들이야말로 이걸 원할지 몰라. 자기 손으로 하기 싫은 걸 인공지능이 대신 해주니까. 재호, 그게 현실에서 돈을 버는 방식이야. 남들이 하기 싫은 걸 대신 해주는 거.
--- p.19

며칠 뒤 재호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세희가 알려준 병원으로 갔다. 세희 말대로였다. 별별 행색과 나이의 부모들이 무버에 태운 아이들을 데리고 난민처럼 늘어선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줄을 설 필요가 없는데, 메신저로 순번을 알려주는데도 다들 마음이 급했다. 말 그대로 ‘자식 일’, 자식을 낳아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그 말의 중압감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부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태블릿 컴퓨터만 보고 있거나 아예 딴 세상인 듯 고글형 컴퓨터를 쓰고 있었다. 하나같이 작고 빼빼 마른 체구들이 눈에 띄었다. 재호는 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는 건가 싶은, 뭔가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세희의 말대로 자기만 겪는 게 아니었으니까, 다들 이러고 살고 있구나 싶었으니까.
--- p.41

죽어가는 걸까, 다만 착실히 죽어가는 걸까. 그래도 상관없겠다는, 어쩌면 그러는 편이 낫겠다는 감상조차 없었다. 선명한 상실의 감각 같은 건 아무 위안도 되지 않았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럴 만큼 잃어버린 남편과 아들을 사랑했다는 건 확인이나 증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영인은 코트에 손을 넣고 터벅터벅 교문으로 걸어갔다. 운동장에 쌓인 눈이 가죽 부츠에 밟혔다. 뽀득뽀득 소리가 들렸다. 계속 걷고 싶었다.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갑자기 요란한 경보음이 울린 건 영인이 교문 앞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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