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각국이 지리적으로 인접하기에 서로의 역사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유럽의 역사’라는 천이 짜졌다. 특히 19세기 제국주의 정책으로 유럽은 세계 각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럽인들은 이때 유럽사가 세계사의 주역이 됐다고 간주하는데, 그 역사적 흐름 속에서 유럽과 독일이 한층 더 강력하게 연결된다.
--- p.14, 「프롤로그」중에서
영국의 메리 풀브룩 교수가 강조했듯이 ‘도이칠란트(Deutschland)’라는 이름은 부족 혹은 일정한 영토가 아니라 언어에서 유래됐다. 이는 유럽 역사에서 독특한 경우다. 11세기 들어서야 ‘독일(도이치)의 땅(Terra Teutonica)’과 ‘독일(도이치) 왕국(Regnum Teutonicum)’이라는 표현이 사용됐지만 ‘하나의 독일 국가’라는 개념은 오랜 세월 불투명했다. 14세기 중반까지 ‘독일의 나라들’이라는 복수형이 독일어를 쓰는 하나의 나라 ‘도이칠란트’라는 단수형보다 훨씬 빈번하게 사용됐다.
--- p.34, 「1장 로마를 계승한 게르만족, 로마에서 점차 분리되다」중에서
유럽 역사에서 독일의 역할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당연히 ‘유럽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카를 대제가 독일 역사의 시초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독일(도이치)’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프랑켄의 콘라트가 왕으로 추대된 911년이나, 오토 대제가 즉위한 936년을 독일사의 진정한 시작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의 정체성 자체가 매우 논쟁적인 개념이다. 하겐 슐체 교수가 지적하듯이 고대 로마 이래 라인강 동쪽 지역에 거주하던 귀족들은 스스로를 프랑크 왕국의 구성원으로 이해했다. 동프랑크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뿌리를 카롤링거 왕가의 전통 혹은 더 소급해서 로마에서 찾았다. 그들에게 ‘독일’이라는 명칭이나 개념은 아예 없었다. 마찬가지로 오토 1세 때의 제국도 ‘모든 프랑크족과 작센족의 제국’으로 이해됐다. 자국의 역사가 프랑크족에서 시작됐으며 이후 작센족이 추가됐다는 의미다.
--- p.47, 「1장 로마를 계승한 게르만족, 로마에서 점차 분리되다」중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은 신성로마제국 안에 있던 300개가 넘는 영방국가의 제후들에게 영토에 대한 주권과 외교권, 조약 체결권을 주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제국의 기관들에 계속 충성해야 한다는 의무가 부과됐지만 형식상의 규정이었다. 여기에서 주권은 공작이나 백작과 같은 제후들이 황제나 교황으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다. 종교 문제는 물론이고 국가(제후국) 운영에 관한 권한도 제후들이 보유하게 됐다. 근대국가의 특징인 주권과 조약 체결권이 명시됐다. 이 때문에 베스트팔렌 조약은 근대 국제체제의 출발점이라고 불린다.
--- p.70, 「1장 로마를 계승한 게르만족, 로마에서 점차 분리되다」중에서
『유럽사 이야기』를 쓴 영국의 소설가 D.H. 로렌스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유럽이라는 지도를 완성한 사람 중의 하나’로 규정했다. 프랑스와 영국, 오스트리아 등 당시 유럽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존재감이 미미했던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확대하고 오스트리아와 당당히 겨룰 수 있는 국가로 만든 게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장수 교수는 대왕의 업적을, ‘프로이센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이축(二軸) 시대를 구축한 것’이라 평가했다. 기존에는 오스트리아라는 하나의 축만 있었다면 프리드리히 대왕 집권 이후 프로이센이 또 하나의 축으로 부상한 것이다.
--- p.95, 「2장 프로이센의 대두와 독일 민족의 형성」중에서
역사가들은 대체로 관세 동맹이 프로이센의 리더십 아래 독일의 정치적 통일을 위한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한다. 반면에 경제사가 한스?요아힘 포트(Hans-Joachim Voth)의 의견에 따르면, 관세 동맹에 가입한 작은 영방국가들은 관세 인하에 따른 교역촉진으로 얻은 이익을 자국의 독립을 강화하는 데 썼다고 봤다. 이들은 대국 프로이센이 주도한 관세 동맹에 가입할 수 밖에 없었지만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에는 여전히 의구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 p.142, 「3장 경제통합에서 정치통찹으로, 뒤늦은 통일과 독일 제국의 발전」중에서
그림 형제는 독일이 나폴레옹의 압제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동화를 수집해 출간했다. 또한 독일어 문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독어독문학이라는 학문 분과를 세우는 데에 기여했다. 이런 작업 모두 독일 민족주의와 독일인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대영박물관의 관장 닐 맥그리거가 평가했듯이 백설공주가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 셈이다.
--- p.151, 「3장 경제통합에서 정치통찹으로, 뒤늦은 통일과 독일 제국의 발전」중에서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통일에 만족하며 팽창주의적인 대외정책을 실행하지 않음을 다른 강대국에 지속적으로 알려서 그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따라서 1890년 총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철혈재상은 현상 유지 그리고 프랑스의 고립화를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실행했다. 프랑스의 동맹 체결을 저지하고 독일이 중심이 되는 복잡한 동맹 체제를 구성했는데, 이게 ‘비스마르크 체제’다.
--- p.178, 「3장 경제통합에서 정치통찹으로, 뒤늦은 통일과 독일 제국의 발전」중에서
케인스는 이런 ‘강요된 평화’가 유럽의 경제를 파괴해 독일의 보복을 불러올 것이라 경고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 유럽경제가 독일을 핵심축으로 돌아갔음을 통계자료로 쉽게 설명했다. 과거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와 같은 상당수 유럽 국가에 제일 중요한 수출 시장은 독일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요구대로 독일 경제가 감당할 수 없는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면 경제가 파괴된다. 이것이 케인스의 명쾌한 설명이다. 전후 유럽을 다시 살리려는 회담이 되어야 하는데, 이 회담은 독일을 파괴했다. 결국에는 유럽을 파괴할 회담이라고 케인스는 맹공을 퍼부었다.
--- p.229~230, 「4장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의 제3제국,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서
체임벌린 총리는 독재자에게 끌려다녀 히틀러의 야욕을 더 키웠기 때문에, 유화정책을 실시한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았고 대공황도 겨우 극복해 나가는 마당에 또 다른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영국에서 우세했다.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너무 가혹했고 이에 영국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인식도 있었다. 영국에서 재무장이 지지부진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 p.264, 「4장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의 제3제국,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서
에르하르트는 흔히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의 아버지’라 불린다. 독일의 경제체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자유시장경제를 보장하면서도 독점과 가격 담합 등 경쟁을 해치는 행위를 국가가 강력하게 규제한다. 아울러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체제를 촘촘하게 갖춘다. 예를 들면 노동자 해고 요건이 아주 엄격하고, 실직한 근로자에게 일정 기간 실업급여를 보장한다. 보통 신자유주의가 시장의 기능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최소한의 복지 체제를 갖춘 것과는 대비된다. 현재도 독일 연방 경제부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는 자유적이고 열린 민주사회의 토대이다.”라고 명시하며 에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계승했음을 알린다.
--- p.329, 「5장 국토 분단과 통일,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중에서
1949년 첫 총선부터 연달아 기민당에 패배한 사민당은 변화를 시도했다. 그 첫 결실이 고데스베르크(Godesberg) 강령이다. 이 문서에서사민당은 더 이상 계급주의 정당이 아니라 대중정당임을 대내외에 알렸고, 시장경제를 지지하며 개혁하겠다고 선언했다. 고데스베르크 강령은 1959년 11월 서독 수도 본 인근에서 열린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채택됐다. 지도부도 대폭 물갈이되어 쇄신한 정당에 걸맞게, ‘노인네’ 아데나워와 견줘 아주 대조적인 참신한 인물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빌리 브란트였다. 그는 1961년 가을 총선에서 당시 47살에 총리 도전장을 냈다. 아데나워보다 38살 젊어서 아들뻘이었다. 사민당은 선거전략도 새로이 짰다. 그들은 미국의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선거전을 모방해 브란트를 ‘독일의 존 F. 케네디’라 묘사했다. 그가 가족과 함께 다정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 전국을 유세하며 시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 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 p.333, 「5장 국토 분단과 통일,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중에서
통일 후 ‘오시스Ossis와 베시스Wessis’라는 속어가 만들어졌다. 서독지역 주민들은 동독 지역 동포를 ‘오시스’ 또는 ‘초니스Zonis’ 라고 부른다. 시골뜨기라는 경멸의 의미를 지닌 이 속어의 이면에는, 서독인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경제적 성과를 게으른 동독인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정책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다. 반면 동독 지역 주민들은 서독 지역 시민들을 ‘베시스’라고 부르는데, 졸부라는 의미다. 또 동독 지역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독일 문화가 발전한 곳이었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서독 지역은 돈만 알지 이기적이고 문화적 정통성이 없다는 비아냥이 섞여 있다.
--- p.366, 「5장 국토 분단과 통일,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