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한 곡으로 사람들이 참 행복해하는구나! 이렇게 웃는구나!”
내가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순수한 행복감을 느꼈다. 수많은 노래 중에서도 트로트를 불렀을 때 유독 환한 웃음이 터졌는데, 누가 선동하지 않아도 저절로 박수를 치고 따라 부르며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추는 분들도 있었다. 삶에서 지쳤을 때 말없이 품어주는 산과 강처럼, 살아가며 낙담하고 풀이 죽어 기운 내기 어려운 사람들을 노래로 위로해 주고 달래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때의 이런 기억이 씨앗처럼 남아 있다가 가수가 된 뒤에도 노래를 계속 부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 것 같다.
--- p.36
엎어져도 자빠져도 내 인생이었다. 집안의 빚은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빚을 탓하며 인생을 망친다면 그건 내 잘못이었다. 내 삶이니 책임도 내가 지는 게 옳았다. 이렇게 살지 않을 거라고 이를 악물고 이겨내든, 오늘 하루만 버티자고 묵묵히 참아내든 다른 사람이 살아줄 인생이 아니었다. ‘하루만, 오늘 하루만 살아내자’라는 심정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학교는 졸업하자고 다짐했다.
--- p.63
누군가는 나에게 노래를 대하는 자세가 너무 진지하다고 말한다. 진지한 대화도 있지만 가벼운 대화도 있는 것처럼 때로는 가볍게 불러도 되지 않느냐고 한다. 경쾌한 노래를 신나게 부를 수는 있지만 노래 자체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빠른 템포의 곡이라고 무조건 신나는 것도 아니고, 느린 곡이라고 무조건 무거운 것도 아니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하나둘 공부하며 쌓아온 내공으로도 노래는 여전히 어려운데 20년 전에는 얼마나 부족함이 많았겠는가. 그런데 정작 그때는 젊음이라는 패기 하나로 밀어붙이듯 노래를 불렀으니 좋은 기회를 맞았다고 한들 부족한 것투성이였다.
--- pp.87-88
그래도 나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있지만 끝끝내 포기하진 않았다.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정신력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언젠가 다시 노래하고 싶다는 소망을 놓지 못해서였다. 노래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고통이지만, 나를 구원한 것도 노래였다. 지치고 고단한 시절을 견디게 했던 것도 노래였다. 어둡고 우울한 밤을 지나 해가 다시 뜨는 아침을 맞게 해준 것도 노래였다. 노래가 나를 살게 한 것이다.
--- pp.107-108
내게도 꿈의 무대가 있다. 신인 때는 무조건 화려하고 큰 무대를 꿈꾸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무대는 크기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큰 무대에서도 한없이 초라해질 수 있고, 작은 무대에서도 가슴 벅찰 만큼 큰 감동을 받기도 한다. 무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마음이 없다면 무대는 공허한 장소에 불과할 것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꿈의 무대도 마음이 통하는 곳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하나 있다. 나를 보기 위해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직접 찾아가는 것이다. 한 분 한 분 눈도 마주치고, 손도 잡아드리고, 가만가만 등도 도닥여 드리면서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바탕 노래도 하고, 흥이 나면 같이 춤을 춰도 좋으리라. 우리네 전통 마당놀이처럼 무대 위에서 연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악극 형태의 콘서트를 하는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잔디 마당’이라고나 할까.
--- pp.139-141
그 에너지를 다른 말로 하면 ‘감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감동(感動). 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노래는 부르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과 나누는 시간이다. 함께 나누는 순간들이 무엇보다 귀중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에 무대에 선 순간마다 최대한 즐기고, 마음을 다해 노래하게 된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열심히 노래를 불러온 것처럼 앞으로 20년은 거뜬히 더 노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엔? 아마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기 힘든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마음껏 무대를 욕심내지 않을까.
--- pp.142-143
그래도 나이를 아주 헛먹은 것은 아닌지 나이 듦이 주는 편안함과 지혜가 조금은 생긴 것 같다. 바닥을 치면 올라올 힘이 생기고, 정상에 오르면 내려갈 일이 생기며, 내려가는 길이 항상 나쁜 것도 아니고, 가다 보면 또 다른 길이 보여서 새로운 기회를 만나기도 한다. 좋은 일 나쁜 일이 파도처럼 오가지만 결국 파도가 바다의 일부인 것처럼 내가 경험하는 다양한 일들도 내 삶의 일부인 것이다. 예전엔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환경을 탓하거나 자신을 탓했는데 이제는 누가 잘못하지 않았어도 상황이 그렇게 꼬이기도 한다는 것을 수용할 정도는 된 것 같다.
--- p.156
이렇게 아슬아슬한 곳이 가요계이고, 버티기 힘든 곳이 연예계지만 그래도 실력 있는 후배 가수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는 것을 보면 ‘역시는 역시’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걸려도 자신의 보폭에 맞춰 자기 자리를 만들며 필드에 남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아무리 작은 무대여도 최선을 다하고, 주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한다는 것이다. 한 번의 행운은 우연히 주어지지만, 오래가는 행복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진정성을 가진 사람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빛을 발한다.
--- pp.2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