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 소리가 가득가득 들어찬,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고 싶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티셔츠 차림의 여자애가 나를 봤다. 앉은키가 꽤 커서 나랑 눈높이가 같았다. 옅은 자연 갈색의 머리카락이 턱 아래까지 내려오고, 쌍꺼풀 없는 눈은 컸다.
그 애가 대뜸 내게 말했다.
“……워요.”
“네?”
“소리가 너무 커서 시끄러워요.”
--- p.8
“축하해, 문아.”
처음으로 일간지 주최 콩쿠르에서 일등을 했을 때였다. 지환 형은 그때쯤 피아노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지환 형이 내민 손을 잡자 지금처럼 바늘에 찔린 듯한 찌릿하고 날카로운 감촉이 내 왼쪽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가시 여러 개가 박힌 것 같은 따끔따끔한 통증.
그리고…… 이모. 연습을 빼먹고 한강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온 날, 내 관자놀이를 쿡쿡 찌르는 이모의 손을 그만하라고 붙잡았을 때였다.
아,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지금 고통만으로도 끔찍하니까.
--- p.16~17
김별의 시선이 우리 쪽을 향했다. 이선이 그와 눈도 못 마주치며 귀 뒤로 머리를 넘겼을 때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게 잘생긴 남자를 봤을 때 여자의 평균 반응인가. 나는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김별을 응시했다.
“얘들이 누군데?”
“나중에 설명할게, 별아.”
도운 형이 제게 원숭이같이 달라붙은 김별의 손을 떼어 냈다. 하지만 김별은 떼어 낸다고 쉽게 떼어지는 인간이 아니었다.
--- p.38
“너 등굣길에 이러면 애들이 오해한다?”
“그런 거 아닌데.”
“혹시 나 좋아해? 좋아하면 고백하든가.”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나를 따라 멈춰 선 이선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하면 받아 줘?”
“뭐?”
“고백. 하면 받아 주냐고.”
이선의 큰 눈이 잠시 더 커졌다.
--- p.51
“마지막 줄에 이거 뭐라고 쓴 거임?”
김별이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줄의 ‘정기 모임: 수요일 방과 후’는 글씨가 정말 너무 작아서 슬쩍 보면 그냥 점 같았다.
“우리 동아리 활동 내역을 적어야 하거든? 이거 대충 1층이랑 2층 복도 게시판에 붙여. 사진 찍게. 일단 붙여 놓고 아무도 안 왔다고 해도 되니까.”
지연 선배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말하는 게 느껴졌다. 뭐, 글씨가 이렇게 작으면 아무도 안 볼 것 같긴 하다.
--- p.65
선은 내 이상형이다. 동경한다. 예쁘고, 자유로운 연주를 하고,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콤플렉스일 이야기를 당당하게 한다. 내가 못 가진 것들을 잔뜩 가지고 있다. 그런 애가 만약 김별처럼 끔찍한 고통을 품고 있다면, 사실은 마음속 깊숙이 곪아 터진 상처가 있다면, 나는 계속 걔를 좋아할 수 있을까?
--- p.77
영화 선배와 닿은 손이 고통을 호소했다. 딱, 딱. 무언가가 내 손을 치는 느낌이 났다.
‘잘못 치면 안 돼. 그러면 콩쿠르에서 떨어질 거야.’
어린 내 손가락 위를 얇은 자로 때리던 이모가 떠올랐다. 나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붙잡은 손을 놓자마자 타격처럼 저릿저릿한 아픔은 금세 끝났다.
멍한 표정으로 영화 선배가 나를 올려다봤다
--- p.104
“난 유명해지는 일은 절대 안 할 거야.”
“어릴 때는 아역 배우였다면서?”
재차 묻자 김별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연기하는 건 재밌었지만, 나중에 취미로 할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불현듯 왼손에 전달되었던 김별의 불안과 공포의 끔찍한 강도가 떠올랐다. 김별이 콜라 캔을 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p.118
이런 게 말로만 듣던 극성팬이라는 거구나. 연예인한테만 생기는 줄 알았다.
사레 때문에 콧물을 훌쩍거리던 나는 김별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다리뿐 아니라 손까지 떨고 있었다.
“혹시 이 학교…… 나 때문에…… 온 거야?”
김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뇨. 이 학교만큼은 오기 싫었는데, 아빠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그나마 김별 오빠가 있어서 좀 다행이었달까. 그래도 전학 갈 거예요.”
“……전학을 간다고?”
“네. 근데 내 얘기하러 온 거 아닌데.”
--- p.135
“난 항상 이 손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선아, 지금은 아니야. 내 손을 잡아. 반드시 지금보다 괜찮아질 거야.”
선의 무표정이 서서히 풀어지고, 물어뜯던 입술이 삐죽이듯 일그러졌다. 이선의 하얀 얼굴은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 기절하면, 선생님 좀 불러 줘.”
울먹이던 선의 얼굴 위로 작게 미소가 번지자, 나는 그제야 내 안에서 올라오던 화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선의 손이 점점 가까워졌다.
--- p.167
도대체 왜 여기에 렌토가 붙어 있는지, 작곡가의 의도를 생각해 봤어?
이번에는 내 목소리였다.
왼손이 연주를 멈춘 의도. 넌 그 의도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
이선의 킥은 정말 아팠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면서 깨달았다. 내 왼손은 계속 내게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 p.186
피아노를 친다면서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떨 때 화가 나는가, 어떨 때 웃는가, 어떨 때 눈물을 흘리는가, 그리고 어떨 때 감정을 숨기려 하는가. 사실 그런 건,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피아노를 치고 싶지 않아 하는 내 모습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밀어 두었다. 나라는 인간은, 빠지는 순간 얼어붙을 수밖에 없는 얼음 바다였다.
그만둔다. 손이 아파서, 재능이 없어서. 사실 그런 이유는 내가 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얗고 검은 건반에 닿을 때, 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선아, 나, 피아노를 계속 치고 싶어.”
--- p.197~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