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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부 매듭 엮기 1. 선과 덩이 2. 문어와 말미잘 3. 객체 없는 세계 4. 물질, 몸짓, 감각, 정서 5. 매듭과 이음매에 관하여 6. 벽 7. 산과 마천루 8. 지면 9. 표면 10. 지식 2부 날씨에 스며들기 11. 회오리바람 12. 길을 따라가는 발자국 13. 바람-걷기 14. 날씨-세계 15. 대기; 분위기 16. 매끄러운 공간에서 부풀어 오르기 17. 휘감기 18. 하늘 아래에서 19. 햇빛과 함께 보기 20. 선과 색 21. 선과 소리 3부 인간하기 22.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의 동사이다 23. 인간 발생론 24. 하기, 겪기 25. 미로와 미궁 26. 교육과 주의 27. 복종이 이끌고 숙련이 따른다 28. 하나의 삶 29. 사이-안 30. 선들의 조응 옮긴이의 글 참고 문헌 찾아보기 |
Tim Ing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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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우리에게 삶을 준다. 선이 생겨나 덩이의 독점에서 벗어났을 때 생명이 시작됐다. 덩이가 영토화의 원리를 입증한다면, 선은 탈 영토화라는 그 반대의 원리를 실증한다.
--- p.18 “당신은 자신이 완성됐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정말로 큰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구성하는 물질, 즉 콘크리트, 철강, 유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또 그러한 물질이 현재 주조된 형태로 영원히 지속하리라 생각합니까? 이 물질들은 대지에서 왔으며, 결국 대지로 돌아갈 겁니다. 나는 그것들을 당신에게 양보하지만, 그것은 내가 참고 있을 때뿐입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내 살, 내 물질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당신의 뼈대 속에 일어서 있습니다.” --- p.70 존재는 날씨에 노출됨에 따라 자신의 선을 따라 계속 나아가기 위해 매질에서 영감, 강함, 회복력을 끌어낸다. 풍화는 존재들의 촉감이나 질감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그것들을 공감 속에 묶어 낼 수 있다. 그 속에서 자연의 다양한 힘의 회오리는 선의 길쌈으로 변화하며, 폭풍우는 시간을 만들어 낸다. --- p.139 메를로퐁티는 그 이유에 대해 그것들의 분열이 종결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으로 되돌아온다”라고 말을 잇는다. 우리는 놀랍게도 반짝이는 별이 우리 자신의 눈이라는 사실, 즉 우리가 별을 그저 볼 뿐만 아니라 별과 함께 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고흐가 그린 것은 천체 투영관에서 흔히 상영되는 총체로서의 하늘의 파노라마가 아니다. 그의 그림은 화가가 본 것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우주로 열리면서 폭죽 세례처럼 폭발하는 듯한 시각의 탄생을 선과 색으로 상연한다. --- p.182 이것이 바로 삶의 독특한 점이다. 매 순간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무엇이 되고 있는지를 해결해야 하므로 어떤 지점에서도 과정은 최종 결말에 도달할 수 없다. 달성은 언제나 연기되고 언제나 ‘아직 아니다’. 인간은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항상 인간이 되어 가고 있으며 그 진전과 함께 자신을 창조한다 --- p.266 이 과정에는 열망하는 존재만이 있다. 이 존재에게 하기는 겪기에 틀 지어지며 그의 행위성이 아직 행동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타자와 함께하는 그의 삶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주의를 기울여서 미로보다는 미궁 속에서 살아지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도, 객체도, 주체-객체 잡종도 없이 오직 동사만 있는 사이-안에서 한가운데의 흐름으로 살아지는 하나의 내재적 삶이다. 우리가 인간을 찾은 곳이 어디든 인간은 인간하고 있다. --- p.288 |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는 사회 인류학을 비롯한 근대 사회과학이 부딪히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대안을 모색했던 인류학자 팀 잉골드가 60세에 이르러 30년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3부작 중 하나다.
덩이와 블록, 체인, 컨테이너로 보았을 때 설명할 수 없던 것과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선과 매듭으로 읽어내며 벽, 산과 마천루, 지면 …… 존재와 생명을 이야기한다. 나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날씨와 대기를 선으로 풀어내면서 매질로서의 공기와 빛, 소리의 감각을 가져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의 관점에서 인간의 의미에 대해 묻고 동사로서의 인간, 선으로서의 삶과 교육에 대해 논한다. 방랑자의 걷기를 닮은 이 책은 인류학을 바탕으로 생태학, 건축학, 기상학, 미학, 사회학 등의 방법론적 융합을 통해 지구 주민의 존재론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선과 매듭 선과 매듭으로 생각했을 때 보이는 것이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저자는 학문의 정의와 범주부터 재검토한다. 생태학은 유기체와 환경에 관한 연구로 정의해왔고 그 속에서 유기체는 껍질과 피부에 에워싼 덩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덩이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실제로 생명은 덩이와 선의 조합이며 선이 있어야, 그 선이 다른 선과 만나야 생명이 시작된다. 저자는 군집과 같은 초유기체를 모델로 하는 사회 개념을 비판하면서 덩이의 원리에 기초하는 한 생태학과 마찬가지로 사회학은 살아가는 존재들 간의 관계라는 진정한 의미를 밝힐 수 없으며 선의 관점에서 사회적 삶이란 서로 활기를 불어넣는 생명 활동임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 눈에 선들이 엮어가는 그물망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블록, 체인, 컨테이너 등 분절된 덩이의 메타포가 세계를 압도해왔기 때문이다. 단절과 파편으로 귀결되는 것들은 기억이 없다. 낱개의 체인 고리가 풀리면 체인이 어디에서 어떻게 걸려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선은 매듭에서 풀려도 매듭의 형상을 기억한다. 선들은 과거의 연결 기억을 형상으로 남겨두며 그 상태에서 더욱 새롭게 다음을 기약한다. 또 다른 선들과 엮이고 풀리기를 반복하면 나아가는 선.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고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관계는 고정되거나 불변한 것이 아니라 엮였다가 풀리기를 반복하며 삶의 자취를 남긴다. 모든 것을 기억하며 흔적을 남기는 선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것을 포괄한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정해져 있는 직선이 아니라 감각을 동원해서 실과 흔적을 찾아가는 삶. 방랑자의 걷기처럼 저자는 벽, 산과 마천루. 지면. 지식 사이를 걸으며 선과 매듭을 읽고 인류학, 건축학, 철학, 심리학을 연결하고 엮어낸다. 날씨, 대기, 빛, 소리, 색 유기체를 덩이로 규정할 때 생명의 활동성을 해명할 수 없듯이 생태학을 환경이라는 베이스보드에 고형물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 그 역동성을 잃는다. 현실 세계는 공기, 빛, 소리, 색 등의 다양한 매질로 넘쳐나며 그것들의 끊임없는 흐름은 날씨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런 날씨의 영향을 받고 있고 그 매질 속 선을 따라 상호 침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인식에서 날씨를 제거했다. 저자에 따르면 날씨 없는 세계는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전도의 결과이다. 근대 이전 날씨의 경험은 공기라는 매질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우리의 정서를 통합해왔다. 그러나 기상학이 성립되면서 대기는 정서를 배제한 산소와 질소 가스로 다뤄지고 미학의 분위기는 공기가 아닌 에테르의 감각적인 경험만을, 진공상태에 놓인 감수성만을 보여준다. 물고기의 움직임이 바닷속에 있음을 가리키듯이 우리의 움직임은 공기 속에 있음을 가리킨다. 움직임의 호흡은 공기가 생성하고 유동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날씨 세계는 신체의 정신적인 참여를 유도하면서 감각의 경로를 따라 선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이 선이 엮는 매듭과 그물망은 공감을 만들어낸다. 이는 고고학자가 석조 기념물을 쓰다듬을 때 자기 손에 돌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고 북서 태평양 연안의 툴링깃족의 빙하가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빙하가 귀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레같이 갈라지는 얼음 소리와 눈뜰 수 없을 정도의 하얀빛으로 꽉 찬 대기 속에 자신의 소리 선이 공감을 일으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기와 빛과 소리에 완전히 에워싸이는 공감의 경험이야말로 근대가 지운 대기일 것이다. 우주적인 것과 정동적인 것의 융합과 분열로서 대기의 날씨 세계는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지각을 통해 선이 생성되는 삶의 현장이다. 잉골드는 깁슨의 지각 심리학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거쳐 날씨-세계를 우리 지각의 영역으로 가져온다. 매질로서의 공기를, 밤하늘의 별빛 속에서 나를 떠난 내가 우주와 통합하는 시각적 의식을 포착하고자 했던 고흐의 그림 등을 이야기하며 빛과 소리. 색의 감각을 다시 새롭게 가져온다. 동사로서의 인간 그렇다면 선의 관점에서 인간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의 인간론을 가져와 인간적 삶의 문법적 형태는 동명사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이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생산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정신에 인간성을 호소하는 것은 도달할 수 없는 결말을 기원에 놓는 것과 같다. 잉골드는 인간 발생론의 동명사는 주어도 목적어도 아닌 선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선의 문법적 형태는 동사이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능동의 의지적 주어로서가 아니라 수동의 경험적 행위에서 성장한다. 그는 수동에 대한 능동의 우위를 주장하는 근대 유럽의 인간관을 뒤집고 복종의 인간화를 이야기한다. 다양한 존재의 선들이 엮이는 세계에서 삶은 의도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근대인의 주체 신화는 다양한 존재의 세계를 정복하듯이 타자화하고 인간 자신을 고립시켜 왔다. 저자는 실행과 제작의 의지적 주체를 전복하고 그저 다른 이들이 시도한 선을 계속 이어받는 것, 자취를 찾아내고 그 선을 연장해서 이용하는 것이 삶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주어와 목적어의 관계가 아니라 선들의 동사적 조응으로서의 실천이다. 잉골드는 의도와 주의, 미로와 미궁, 하기와 겪기, 만들기와 성장하기, 사이와 사이-안 등 다양한 이항 비교 대조 속에서 교육으로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교육은 근대적 주체가 재현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재현의 세계 밖으로 존재를 끌어내고 대기의 공감 세계에 그 선을 풀어내는 것이다. 방랑 속에서 찾아가는 것, 선들의 끊임없는 엮임과 풀림의 도정에서 다른 선들에 조응하는 것, 삶의 궤적이 그물망으로 짜이듯이 그 위를 서성이는 것, 교육이란 이 모든 방랑에 뛰어드는 용기를 북돋는 것이라고 말한다. |
객체 없는 세계의 흔적 기행
팀 잉골드의 시선은 '날것'들 혹은 '생생한 것'들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는다. 문명의 골격은 굳건해서 영구히 지속될 것 같지만, 문명은 날것들의 표면에 건조된 '겨우 존재하는 건조물'에 불과하다. 인류학자로서 '인간'이라는 스펙트럼을 가장 자연적인 것과 가장 인공적인 것 사이에서 살피는 잉골드는 문명의 오만을 경고한다. 금속은 녹슬고 파이프와 전선은 쥐에 갉히고 콘크리트 벽은 갈라진다. 자연과 시간은 그렇게 견고한 것에 틈을 낸다. 잉골드의 시선이 이런 곳들을 향하고 있다면, 철학자 들뢰즈와 과타리는 갈라지고 부스러지는 이런 누수 지점을 찾아 그리로 빠져나가자자고 제안한다. 그것이 이른바 '도주선'이다. 도주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시도가 아니라 다소간 군색하고 비열하기까지 한 몸부림이다.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에서 잉골드가 보여주는 지점들은 도주를 시도해 볼 만한 지점들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 보면 어쩌면 저런 곳들을, 아니 저런 곳들만 찾아냈을까 하는 신기함마저 터져나온다. 세상이 그런 허약함들에 기초하고 있다면, 인간이 그동한 구축해 온 문화와 문명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메를르퐁티와 아렌트를 넘어 베르그손과 나가르주나 혹은 니체까지 미치지 못한 한계는 남지만, 그레이엄 하만의 '객체 지향 존재론'과 까스뜨루의 '퍼스펙시브주의'에 맞서는 잉골드의 '객체 없는 세계'는 큰 울림과 설득력을 갖는다. 다만, 내가 오래 공부해 익숙한 들뢰즈와 과타리의 철학은 그렇다면 어떤 자리에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또 책을 덮으며, 길게 울리는 질문이다. - 김재인 (철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