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야기도를 이어가던 어느 날, 아내가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서원했다는 기도제목을 내게 털어놓았다. “여보,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새 성전을 주신다면, 우리 부부가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서원을 나 혼자 하나님께 했어요.” 나에겐 한마디 상의 없이 한 서원치고는 심히 놀라운 것이었다. 아내의 말이 처음엔 너무나 황당했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간절할 때라 마냥 아내 탓만 할 수 없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목회자와 복음전도자가 되겠다고 서원했기에 선교는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다. 나로선 한국에서 목회하든 선교사가 되든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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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어학교에서 만난 OMF의 신임 선교사들이 선배의 간섭 때문에 불평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슈퍼바이저가 안 된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간섭받는 것, 다시 말해 돌봄받는 것이 부러워졌다. 맨땅에 헤딩하며 살아가는 것 같은 우리 현실이 오히려 가여웠다. 그때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팀사역’을 해야 한다는 마음을 더 확실히 품게 한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훗날 팀사역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선배가 되면 후배 선교사들을 성심껏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참견이나 간섭이 아닌 돌봄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뒤에서 팀사역에 대해 언급할 때 구체적으로 말하겠지만, 이것은 팀사역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며, 특히 선임이 가져야 할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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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국인보다 낫다고 자랑할 만한 것은 초기 한국교회의 선배로부터 배운 보수 신앙의 전통이나 개혁신학 같은 것뿐인 것 같다. 그런데 태국은 물론이고 세계 어디로 가든 한국의 초년 선교사들이 쉽게 저지르는 실수는 ‘현지인들은 선교사의 말을 들어야 하고, 무엇이든 선교사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 잘났는가? 선교사가 현지인보다 그들의 언어를 잘하는가? 그들의 문화를 현지인보다 더 아는가? 지리를 더 아는가? 전통을 더 잘 아는가? 선교사는 조금 더 많이 배운 것과 선교비를 받는다는 것 외에 현지인보다 잘난 것이 없다. 그런 선교사가 돈(선교비)이 현지인보다 많다는 이유로, 성경을 더 많이 안다는 이유로 현지인을 무시해도 되는가? 선교사로서 선교지에 갔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들보다 나은 뭔가가 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나는 지금은 선교지 태국을 떠나 국내에서 기관(KWMA) 사역을 하고 있지만, 지금도 교만하지 않으려고 매일 매 순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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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들을 우리집에 초대한 것은 특별한 효과를 보았다. 태국 사람들이 외부인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초대한다 해도 어지간하면 가정부가 있기에, 주부가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인 아내는 앞치마를 두르고 직접 만든 음식을 설명하며 섬기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손이 큰 아내는 그들이 맛있게 먹고 관심을 가지는 반찬은 더 만들어서 유리병에 담아, 예쁘게 리본이라도 묶어 선물처럼 드리곤 했다. 젊은 선교사 부부가 이사들을 초대하여 정성껏 대접한 것이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다. 우리는 그 이사들뿐 아니라 알게 된 태국인들을 집에 초청하는 일을 자주 하였다. 이렇게 우리집에서 모여 태동한 사역들이 목회자훈련원, 교회개척학교, 평신도를 위한 선교학교, 예배자학교, 셀교회 운동(태국에서는 강 선교사가 셀교회 운동을 최초로 시작했다), 태국에 파송받은 한인 선교사들을 케어하고 격려하는 락 싸이얌(Love Thailand : 강 선교사가 후배인 중견 선교사들인 김용섭, 장인식, 양덕훈 등과 같이 시작한 것이다) 등이다. 그리고 오아시스힐링센터 또한 우리집에서 선교사들과 식사를 하면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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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목회자훈련원을 열심히 섬겼다. 좋은 소문이 났고, 방콕노회 목회자들도 보람을 느꼈다고 하였다. 그해 10월에 열린 태국기독교총회에서는 총무가 방콕노회가 올린 보고서를 그대로 설명하면서, 목회자훈련원의 장점과 유익에 대해 자랑하였다. 그 후 많은 목사와 장로들이 감동을 받았는지 이 일에 관심을 가졌고, 이사회는 이듬해 5월에 2기생 모집을 결정했다. 그러자 나는 1기생과 2기생을 동시에 훈련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나는 매월 두 주를 이 사역에 매달려야 했다. 훈련원 강의 준비를 하고 교재를 만들고, 한국에서 강사가 오면 통역도 했다. 이 사역에 시간을 많이 쓰는 것이 부담이 되었지만, 그래도 태국교회가 원하는 일이라면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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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강의하다 말이 막히면 한국 선교사를 경험해본 태국 목회자가 손을 들고 일어나 이렇게 질문하기도 했다. “지금 강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런 뜻이지요?” 그가 이해한 말이 맞으면 내가 “맞아요. 바로 그 뜻이에요!” 하며 맞장구를 치는 재미있는 상황도 자주 연출됐다. 나는 설명하다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해지면, 그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수시로 “이해하고 있지요?”라고 묻기도 했다. 그럴 때 그들의 대답은 내게 상처를 입혔지만 도전도 주는 것이었다. “듣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말이나 어서 하십시오!”
내가 비록 태국어에 능숙하지 않아 잘 설명하진 못해도, 자기들은 하나라도 더 듣고 싶으니 일단 빨리 진행하기나 하라는 말이었다. 내가 더듬거려 흘러가는 시간마저 아까웠던 것이다. 그때는 머쓱했지만, 배우려는 그들의 열심은 적극적이고 본받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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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역한 태국교회에서 선교사의 역할은 동역자(Partner) 혹은 참가자(Participant) 단계에 해당한다고 불 수 있다. 내가 태국에 간 1987년만 해도 노회 조직이 일찌감치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이 선교사를 섬기는 모습도 탁월하며, 그들 가운데엔 재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런 선교지를 섬길 때, 선교사는 결코 양육자(Parent)일 수만 없다.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최대한 겸손하게 접근하되, 그들에게 아직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보완해주고 도울 수 있으면 된다. 그것이 바로 동역자 혹은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태국에서 한인목회 대신 현지인을 대상으로 사역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목회자훈련원과 교회개척운동을 한 것이 동역자 선교의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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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는 앞으로 ‘돈 중심의 선교’ 방식을 포기하고, 서구가 지금까지 보여온 선교 방식, 즉 사역은 선교사와 선교단체가 하고 교회는 후원하고 기도만 하는 돈 중심의 선교, 이른바 크리스텐덤(Christendom) 선교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가난하거나 작은 교회도 선교할 수 있도록 모든 성도가 선교적 마음을 가진 선교적 크리스천(Mission-minded Christian)이 되고, 교회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가 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의 260만 명의 이주민들에게도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정책이 필요하다. 이것은 2023년에 개최한 NCOWE(National Consultation on World Evangelization)에서 다룬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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