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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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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3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72쪽 | 222g | 130*213*12mm
ISBN13 9791159923975
ISBN10 1159923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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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감옥과도 같은 프랑스 교육 시스템에는 진로를 조사하는 과정이 포함돼 있었다. 설문지에 ‘희망 직업’을 적으라는 문항이 있었는데, 나프나프는 ‘파라오의 수호자’, ‘수난을 겪는 브랜디 제조자’, ‘빙빙 돌며 춤추는 탁발승’같이 남다른 수사를 사용해 장래희망을 써냈다. 누군가가 그에게 나우펠Naoufel의 철자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면, 언제나 괴사Nerose의 N, 관절염Arthrit의 A, 다래끼Orgelet의 O, 두드러기Urticaire의 U, 누공Fistule의 F, 습진Eczea의 E, 나병(Lere)의 L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자신의 프랑스어 능력과는 무관하게 그는 점차 열등하고 무기력하고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 p.11

그날 저녁, 그는 사촌 여동생의 합법적인 감시자인 남편의 주소를 알아내려고 독사 하르픽을 다시 찾아갔다. 독사는 입술을 핥으며 새로운 소식들을 뱉어냈다. 나프나프는 독사의 이야기를 통해 피펫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압데라우프가 여동생에게 했던 ‘포주’ 행위와 순결을 강요한 아버지의 통제가 맞물려, 셰에라자드는 동네에서 ‘피펫’이란 매력적인 별명으로 불렸다. 독사 하르픽은 나우펠에게 그가 숭배하는 피펫에 대해 사실대로 얘기해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고, 이야기를 옮기며 아주 즐거워했다. 독사에 따르면, 순결한 오럴 섹스 아가씨라고도 불리는 피펫은 나우펠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다며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다녔다. 어리석은 난쟁이 숫총각 나프나프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그녀의 미소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p.32-33

누군가 아래쪽 벤치에 장갑 한 짝을 둔 채 깜빡 잊고 그냥 간 모양이었다. 나우펠은 한 시간 가까이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서서 장갑이 눈에 덮여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버려진 장갑이 그의 눈앞에서 추억처럼 희미해졌다. 장갑과 눈 덮인 벤치를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어지자 정원 전체가 사람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눈이 그쳤다. 그는 사라진 장갑과 벤치를 한참 바라보았다. 달콤한 공기에 취한 기분이었다. “죽는다는 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애써도 부모의 얼굴 또한 눈에 묻힌 장갑처럼 기억에서 시나브로 사라질 것이다. 자신도 역시 언젠가는 여기에 없을 것이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자신이 더 이상 풍경의 일부가 되지 않을 그날에 가까워졌다. 인생의 초고에서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면 눈처럼 하얀 페이지만 남을 터였다.
--- pp.48-49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왜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불현듯 깨닫는 것일까?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더라도 만족하며 살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 나는 안경을 쓴 연구원에게 해부당할 위기에 처한 걸까? 이 순간 가장 후회되는 것은 내가 잘려 나간 존재에 대해 품었던 원망이다. 어쩌면 인생에서 실패했을 때보다 거장이 되었을 때 겸손함을 유지하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 p.52

내 안에 있는 생명의 불꽃을 되살리는 데는 가느다란 햇살 한줄기로도 충분하다. 희망이 조금 보인다. 그래도 몸을 뒤덮은 장미 가시와 멍과 동상을 보니 지난밤의 끔찍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럴 힘도 없다. 그러나 잘 알고 있다. 운명이 내 손을 잡으러 선뜻 와주지는 않으리란 사실을.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든 혼자서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어떤 기적에 의해 내 생명의 빛이 다시 켜졌는지는 몰라도, 나는 결국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고 눈곱만큼씩이나마 아픈 몸을 끌고 가는 데 성공한다.
--- pp.88-89

나우펠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머니 속에서 꼭 쥐고 있는 작은 스프레이에는 알라딘 램프의 지니보다 훨씬 유능한 지니가 들어 있었다. 만일 UN이 소방헬기에 이것을 비치해놓는다면, 전쟁이 발발한 모든 지역에 살포하고 나서 전투원들에게 눈 가리고 술래잡기 놀이를 하라고 확성기로 명령만 해도 세계 평화는 해결될 것이다. 이 스프레이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셰에라자드에게 뿌려서 그녀가 모든 사람 앞에서 나우펠에게 사랑을 애걸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 구역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 p.97

가브리엘은 나우펠에게 카메라 렌즈를 들이댔고, 록키 오로르는 귀덮개 같은 걸로 둘러싼 장대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흔들었다. 마르틴 루터 퀸은 나프나프에게 자기소개를 짧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모습을 들킨 토끼처럼 당황한 나우펠은 이름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천연두 바이러스가 인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지구에 살았고 앞으로도 더 오래 살아남을 거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며 횡설수설하며 말을 더듬었다. 문득 병원에 있던 노인의 수첩에 실린 시오랑의 문구가 떠올랐다. “저는 하이에나의 절망을 상상하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납니다.” 마르틴 루터 퀸이 그의 출신을 물으며 나우펠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햄릿》에 쓴 유명한 대사를 본떠 “모로코 사람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죠”라고 말했다. 그 말에 가브리엘만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 p.107

아침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내 몸의 나머지 부분이 바로 저기에 있다는 확신에 압도당한다! 그러나 그 감각은 곧바로 사라진다.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개의 리드줄을 놓고 자갈을 깐 포장도로로 뛰어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 사이로 최대한 빨리 비집고 들어가 허겁지겁 뛰어다니다가 공황이 오기 직전에 멈춰 선다. 내 존재가 나를 버리고 있다! 내 몸이 점점 더 멀어진다! 소리를 크게 질러 부르고 싶지만 내 존재를 알릴 방법도, 목소리도, 캐스터네츠도, 길바닥에 내 이름을 표시할 분필도 없다. 신호는 이미 끊겼다. 내 몸과 영혼이 나 없이 떠나버렸다. 심지어 내 동생인 왼손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모든 희망이 무너져 내린다. 나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망연자실하여 그곳에 머무른다. 래브라도는 나를 다시 입에 물고 데려가려고 주인에게 억지를 부려 발길을 돌리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내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제일 먼저 사람들에게 밟히고 혐오감에 휩싸인 눈들에 둘러싸인 후, 대학 연구실로 되돌아가 실습용 해부 교재로 쓰일 것이다. 하지만 의지가 꺾였는데도 나도 모르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충동이 불끈 솟아오른다. 나는 인도 위에 서 있는 오토바이 바큇살에 손가락을 걸고 옆에 달린 짐가방의 덮개를 열어 그 안으로 들어간다.
--- pp.114-115

몇 걸음 걷다가 가브리엘이 침묵을 깨고 대뜸 나우펠이라는 이름의 소리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가브리엘은 예의상 즉시 고개를 돌렸지만, 나우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우펠은 ‘괴사, 관절염, 다래끼, 두드러기, 누공, 습진, 나병’의 앞 글자에서 따온 자기 이름의 철자가 ‘은총Grace, 편안함Aisance, 아름다움Beaute, 웃음Rire, 지성Intelligence, 우아함Elegance, 경쾌함Legerete, 빛Lumiere, 광채Eclat’라는 단어들의 앞 글자로 이루어진 가브리엘이란 이름의 철자와 대등한 상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나우펠이란 이름이 천편일률적이고 단조로운 롤러코스터 같은 데 비해, 가브리엘이란 이름은 뒷발로 딛고 일어선 말처럼 힘차고 우아했다.
--- pp.131-132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기를 기다릴 때, 가브리엘은 왠지 즐거운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나우펠에게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순간 육체적 충동이 일었지만 즉시 억눌렀다. 그는 눈빛에 반응하여 행동하는 대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말의 요지는 간단했다. 지금껏 그녀를 계속 생각했다는 것, 눈이 참 예쁘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정말 아름다우며 키스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말이 마구잡이로 뒤섞여서 한꺼번에 전달됐다. 나우펠은 가장 가까운 맨홀이 홀연히 열려 자신을 삼켜주기만을 고대하며 침묵에 빠졌다. 가브리엘은 너무 큰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어떤 말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프나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우펠은 자신을 완전히 무너뜨릴 문장을 듣지 않기 위해 주머니에서 스프레이를 꺼냈고, 그녀에게 망각의 기체를 뿌렸다.
--- p.149

나우펠은 더는 아무것도 재지 않고 건물로 올라가 젊은 여자의 집 문을 두드렸다. 발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딸깍거리는 소리가 났고, 다음 순간 가브리엘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생기가 가득했고, 알 수 없는 다정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우펠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가브리엘이 천천히 그의 얼굴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을 때 나우펠의 팔이 가브리엘의 등을 감쌌다. 그리고 모든 게 잠잠해졌다. 그의 손들이 티셔츠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렇다. 정확히 그의 두 손이었다. 나우펠은 마치 다시 두 손을 갖게 된 것처럼 비단결 같은 그녀의 피부를 보듬었다. 부모, 순수함, 오른손. 삶이 그에게서 앗아간 것들이 신비롭게도 순식간에 전부 돌아왔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녹색 눈을 가진 젊은 여성을 팔로 감싸 안는 것뿐이었다. ---
--- pp.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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