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經學’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근 1세기 동안 거의 맥이 끊어진 학문 영역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경학’이라는 술어조차도 주로 유학의 사적史的 영역에서 단순히 기술적인 도구로 출몰할 뿐, 본래의 가치성 개념으로서의 인식은 까마득한 구시대의 기억으로서나 명멸할 정도였다. 이러한 경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다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다시 들먹거릴 만한 것이기는 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끊어진 맥을 다시 이어 적극적으로 확충해가야 할 것이 요구된다. 실은 학계 일각에서 이미 그런 기운이 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경학이 왜 다시 요구되는가?
필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사의 변화의 방향이나 성격을 깊이 천착해 설명할 만한 능력은 갖고 있지 않다. 다만 피상적으로 관찰되는, 누구나 아는 몇 가지 현상을 단서로 삼아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냉전체제 해체 후 우리는 새로운 민족주의의 광범한 대두를 보고 있다. 이것은 물론 정치영역에서의 사건이다. 그러나 정치영역에서의 민족주의는 자기 문화전통에의 회시回視가 선행되어 있거나 동반하고 있으며, 적어도 뒤따르기라도 하게 마련이다. 세계사적인 이러한 정황은 결국 구미歐美문화의 종전과 같은 고압적 일방통행을 제약하는 기초 여건으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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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의 주체적인 정립은 오늘날 우리 문학연구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다. 과제의 비중으로 본다면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바람직하기로 말한다면 우리 문학에 대한 근대적인 접근이 시작되던 초기에 대두되었어야 마땅함직한, 그런 성질의 과제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그동안 우리는 줄곧 서양 문학이론의 뒷받침 아래 우리 문학을 보아 왔고 설명하려고 했을 뿐, 우리 자신의 자리를 찾고 마련하려는 반성적인 노력은 거의 없어 왔다. 이제 이 반성적인 노력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물론 서양 문학이론이 그동안 우리 문학이나 문학연구에 기여한 바 공효는 자못 크다. 그것은 문학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혀 주기도 했고, 문학연구에 있어 우리의, 또는 동양의 전통적인 문학이론에는 부족한 논리성이나 체계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켜 주기도 했으며, 부분적으로는 유효한, 문학현상을 다루는 실제적인 방법과 개념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아무리 주체성이 고창되는 마당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해야 마땅하고, 엄폐나 왜곡이 곧 주체성에 이르는 길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문학이론의 주체적인 정립이 곧 서양 문학이론에 대한 무조건의 배타를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것이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득책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이론의 주체적인 정립과는 별개로, 그러나 주체적인 정립이 안 된 상태에서는 다른 각도에서 서양 문학이론은 계속 우리와의 교섭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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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명분론名分論의 날로 더해 가는 발달이다. 명분론은 원래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사회적 조직이 요구하는 질서 부지扶持의 근거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성을 압제하는 데 이르면 질서 혼란이라는 모순에 대응하기 위한 논리로서의 명분론이 도리어 새로운 모순으로 전이된다.
17세기 역사 공간에는 이러한 추세가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주로 임진 · 병자 양란 이후 신분제의 동요 · 이완과 여기에 추동推動된 체제 전반의 동요 · 이완 조짐에 지배층적 입장에서 대응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 명분론 발달의 실체적 구현이 바로 이 시기 예학禮學 · 예설禮說의 호한浩瀚한 산출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 시기에 이르러서의 도학의 이데올로기적 공고화鞏固化 과정의 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갈암의 문집에도 적잖이 들어 있는 예학 관련 논의들도 역사적 입장에서는 일단은 이러한 시각으로써의 이해 대상이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해서 관조해 보면 인간 삶의 존재론적 내포內包의 풍부화 추구라는 적극적 의의가 인정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인간의 사위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적 시각을 유효하게 운용할 것이 요구되나 끝내 여기서만 머물면 사위의 역사성의 궁극에 담겨 있는 천인지제天人之際의 이치를 놓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역사적 시각으로서의 이해 넘어 있는 지평을 전망하고자 하는 시각이 필요한 것은 《갈암집》의 내용에서 비단 이 예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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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문학에서 민족적인 것을 추구해 가는 일입니다. 일단 민중적인 것이 곧 민족적일 수 있을 가능성은 큽니다. 그러나 한문학에 관한 한 이것도 상층 지배분자에 의해 그려집니다. 말하자면 제2차 자료에 속합니다. 그리고 한문학 작품에서 민중적인 사고, 민중적인 감각을 묘사하거나 서술한 작품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민중에 관련되는 지배층의 긍정적인 기록의 대부분은 그들의 애민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애민의식이 민족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지배층 자기들의 삶을 그려놓은 작품을 대상으로 민족적인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한문학은 어디까지가 민족적인 것일까요? 서거정徐居正은 「동문선서東文選序」에서 대단한 선언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동방의 글이다. 송宋 · 원元의 글도 아니고 한漢 · 당唐의 글도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의 글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의 글’을 우리 ‘민족적인 글’이라고 이해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거정의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단순히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서 우리나라 사람의 삶을 한문으로 서술한 것이란 뜻에서 ‘우리나라의 글’이라고 했을까요? 이때 또 의문이 드는 것은 송 · 원이나 한 · 당을 본질적인 타자他者로 인식한 전제에서 ‘우리나라’를 내세웠을까의 여부입니다. 「동문선서」의 전체 문맥으로 봐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민족적인 것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항차 그럴 가능성이 없음에랴. 결국 표면적으로는 대단해 보이는 서거정의 이 선언에서 우리는 민족적인 것을 찾을 어떠한 단서도 얻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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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은 그의 연호인 개국開國 5년(재위 16, 서기 555) 경 서울의 북한산北漢山에, 개국 11년(재위 22, 서기 561)에는 경상남도 창녕의 화왕산火旺山에, 그의 두 번째 연호인 태창太昌 원년(재위 29, 서기 568)에는 함경남도 이원利原의 마운령磨雲嶺에, 그리고 같은 시기에 함경남도 함주咸州의 황초령黃草嶺에 각각 비碑를 세웠다. 당시 팽창하는 신라의 국경을 확정하고, 고구려 · 백제 · 가야에서 새로이 신라 국민으로 편입된 주민을 위무慰撫하여 신라에 일체감을 갖도록 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중 북한산비 · 창녕비 · 황초령비는 비문이 대부분 마멸되어 그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나, 마운령비만은 거의 완전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황초령비는 비문 내용이 마운령비와 거의 같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 가운데 사상사적으로 가장 주목되는 비문은 마운령비, 또는 황초령비의 내용이다.
대저 순풍純風이 불지 않으면 세도世道가 진실되지 않게 되고, 현화玄化가 펼쳐지지 않으면 사특함과 거짓이 다투어 나선다. 이러므로 제왕帝王이 명호名號를 세움에 자기를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수기이안백성修己以安百姓) 않아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왕위를 계승할 차례가 나의 몸에 당하여, 우러러 태조의 기업基業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여 행여 건도乾道에 어그러질까 몸을 조심하고 스스로 근신했다. (중략) 이에 사방 경계를 넓혀 백성과 토지를 광범하게 얻었다. (중략) 굽어 촌탁하건대 새로 얻은 백성과 이전부터 있던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었으나 오히려 도화道化가 두루 미치지 못하여 은혜의 베풂이 아직 있지 않았다고 한다.
--- pp.9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