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나온 우익 인사 46명과 박병근 전도사는 그곳이 그들의 순교지가 될 줄 어찌 알았으랴. 공산당원들의 무차별적인 총살에 의해 박병근 전도사는 끝내 순교의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박병근 전도사의 시신은 두 손은 앞으로 묶이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견되었고, 뒤에서 등에 대고 쏜 총탄이 배를 관통한 흔적이 역력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하나님 앞에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고를 치렀던 박 전도사는 끝내 일본 경찰이 아닌 좌익 사상에 물들은 동포가 쏜 총탄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다. 공산당원들의 체포의 위험이 눈앞에 다가와 있음을 알면서도 끝내 주의 몸 된 교회를 지켰던 박 전도사는 내심 순교의 길을 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해방 전 일제하에서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르면서 순교하지 못했음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죽는 순간까지도 기도하는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순교의 피를 땅에 쏟았던 것이다.
일제 때 신사참배 거부로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서는 손양원 목사님 등과 함께 묶여서 재판정에 오갔다. 그는 그때 순교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신사참배만 아니라 창씨개명도 거절하고 성도들에게 해방의 소망과 주의 강림을 선포하면서 소망을 심어 주었다. 반공운동에도 앞장서서 청년들을 지도했다. 이번에도 변함없이 주님 위해 생명 바칠 일사각오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켰던 것이다.26)
박병근 전도사가 순교한 날은 1950년 추석 이틀 후 지방 유지들과 함께 함평 향교 뒷산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추석 이틀 후면, 정확히 1950년 9월 26일(화)이 추석이니 박병근 전도사의 순교일은 1950년 9월 28일-음력 8월 17일(목요일)이었다. (…)
--- p.102
(…) “전도부인(Bible Woman)의 초기 사역은 여선교사들의 사업을 돕는 경우가 많았으나 점차 사역의 범위가 확대되어 갔다. 전도부인은 여전도인, 여조사(女助事), 여전도사, 부인전도사 등으로도 불렀다. 선교 초기에는 전도부인 양성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이 미비한 상황에서 선교사가 한글을 깨친 여성들에게 개별적으로 성경과 단순한 교리를 가르쳐 전도 사업에 종사하게 했다. 이후 전도부인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여자사경회가 시작된 것은 장로교회의 경우 1897년, 감리교회는 1898년경으로 추정된다. 사경회(査經會)는 일 년에 두 차례 농한기 때에 2~4주 동안 진행되었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함께 전도부인 양성을 위한 전문적인 교육이 더욱 필요해짐에 따라 전도부인 양성을 위한 상설교육기관으로 여자성경학원이 설립, 운영되었다. 성경학원은 1년에 3학기제, 3년 과정의 교육체계를 갗추고 성경, 교리, 교회사, 일반 학문, 전도 실습 등으로 교과목을 구성하여 사경회보다 훨씬 다양하고 폭넓게 전도부인들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전도부인은 선교사들을 조력하면서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성경과 찬송을 파는 권서인(勸書人) 역할을 겸했으며, 한글을 가르쳐 여성 문맹 퇴치 운동에도 앞장섰다. 전도부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역할이 변하기도 했다. 초기 권서인의 역할에서 벗어나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성경공부반을 개최하기도 하였고,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약한 교회의 성장을 위해 헌신하기도 하였다.”
나의 할머니 좌추선도 이와 같이 서서평 선교사를 따라 광주로 나와서 교육을 받고 전도부인으로 파송되어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 사업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성이 특이하여 부친이 이웃 면 반남 대안교회 시무할 때 공산교회 사역했던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
--- p.122
(…) 그해 가을(9월 20일) 영암읍교회 시무 중이던 부친 박병근 전도사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거부로 영암경찰서에 구금되어 13개월간의 유치장 생활과 조사를 받은 후, 광주경찰서로 이송되어, 광주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광주교도소에서 형을 살게 되었다.
당시 15~16세인 장남 환규는 이때부터 신문 배달, 사진관, 양복점 등에서 일하며 가정을 돕기 시작했다. 그 당시 대중교통 수단이었던 목탄차 버스의 조수로 취업하기도 했다. 목탄차 조수로 근무할 때 차 사이에 끼어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고 한다. 그 사이 모친은 고향인 제주를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여, 영암군 군서면 해창리 신흥 부락에 자리를 잡았다. 그 당시 해창 부락 일대는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드는 간척지 개발 사업이 한창이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식량을 수탈하기 위한 전략 중 하나였다. 그 지역 간척지 개발 공사 현장소장(일본인)의 부인이 기독교 신자였다. 그 현장소장의 부인이, 영암읍교회 박 전도사는 감옥에 잡혀가고 그 부인이 어린 4남매를 데리고 교회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 남편에게 이야기하여, 바다를 막아 새로 조성된 논을 무상으로 임대하여 주었다. 간척지 땅이란 소금기가 남아 있어, 몇 년은 물로 씻어 내어 소금기를 제거하여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을 말한다. 그래도 이 가족들은 이 땅을 무상 임대를 받아, 감사하며 열심히 농사를 지었고, 그로 인해 작은 집도 마련하게 되었다.
1943년 11월 19일, 3년 2개월 만에 부친이 출소하여 돌아오셨다. 이곳 신흥 부락 신흥교회에서 다시 사역을 시작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다. 일본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의 눈총 속에서도 부친 박병근 전도사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목회에 정진하였다. 영암군내 장암교회와 구림교회도 겸임하여 시무하던 중 1945년 8 · 15해방을 맞게 된다.
박환규는 부친의 광주형무소 구속 수감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취업 일선으로 나가 3년간을 가사를 도왔다. 부친이 출소하자, 가사를 도우면서 틈틈이 우편을 이용한 통신 과정으로 중학 과정을 공부하였다. 박병근 전도사는 장남 환규를 광주고등성경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장남 환규는 해방 다음 해인 1946년에 광주고등성경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2남 박금규도 광주 숭일중학교에 입학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친인 박병근 전도사도 1947년에 광주 광산교회에서 시무를 하게 되었고, 1948년에는 무안군으로 옮겨 현경면 현경교회에서 시무를 하시었다. 현경교회에서 시무 중일 때 박병근 전도사는 고등성경학교 졸업반인 장남 환규를 당시 이웃 교회인 무안면 매곡교회 전도부인 박소님의 유복자 딸인 문례순과 결혼을 시켰다.
1948년 12월 27일 성경학교 졸업을 앞두고, 그해 성탄절을 지나 무안면 매곡리 매곡교회에서 전정현 목사의 주례로 문례순과 결혼한다. 광주고등성경학교 졸업하자 바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한다.(…)
--- p.137~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