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적어도 현준호와의 만남은 그녀의 현재에 영향을 끼쳤을 테니까.”
“네?”
권 기자는 깜작 놀랐다. 금성도 아니고, 뭐, 현준호?
현준호는 예술가로서의 가치가 크지 않은 사람이다. 한때는 현목성 작가가 신진 예술가를 발굴할 때도 옆에 두었다고 하고 현목성의 작업을 종종 도왔다고 하니 미술학도 시절까진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작가로서의 데뷔 이후 그의 작업은 형편없었다.
반면 금성은 은하와 함께 전시도 하고 작업도 하면서, 큰 시너지 효과를 낳은 예술가다. 금성이 아닌 현준호가 현재의 은하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니, 권 기자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방금의 에피소드도 권 기자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은하의 초기 유명세는 [TV쇼 진퉁짝퉁]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얻었기 때문이다. 온갖 골동품과 절묘한 모조품들을 보며, 단번에 진품을 맞추는 그녀의 적중률은 백발백중에 가까웠다. 골동품 전문가를 무색케 하는 그녀의 신비한 적중률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훈련이나 공부로 얻어진 게 아닌, 설명할 수 없는 제3의 감이 그녀의 눈 속엔 분명 있었다.
“금성이 훨씬 뛰어난 예술가 아닙니까? 그런데 현준호의 영향이 더 크다니요? 방금 이야기도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어요. 현준호가 눈이 뛰어난 작가였다니, 그건 처음 알았는데요? 아니, 그건 그럴 수 있다 쳐도, 은하의 눈은 화가로서 누구보다도 훌륭한데 보는 눈이 없었다고요?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은성은 씁쓸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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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호는 어느 날 은하에게, 화가 로세티와 그의 모델이었던 엘리자베스 시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엘리자베스 시달은 라파엘전파 화가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했던 모델로, 라파엘전파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밀레이의 오필리어]의 모델이었다. ‘비극적으로 처진 눈꺼풀’을 가진 이 모델은 라파엘전파 화가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으로, 시달은 그중 로세티와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했다.
하지만 로세티는 시달을 여신으로서만, 모델로서만 사랑했다.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로 성욕을 처리하고, 시달은 여신처럼 아꼈지 여자나 아내로서 아끼지 않았다. 결국 시달은 아편 중독 끝에 죽음을 맞이하고, 그제야 시달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로세티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을 그렸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준호는 말했다.
“난 로세티가 시달을 여신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작품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해. 성실한 남편이었으면 나오지 못했을 거야. 마지막에 시달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후 그린 그림 역시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땐 이미 시달이 죽은 후라서 끝까지 여신으로 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
은하는 준호 품에 살며시 기대면서 물었다.
“그럼 나는 뭐야? 시달은 아닐 테고, 난 어떤 존재야?”
“어쨌든 나의 예술적 영감을 위해 소모된다는 점에선 시달과 다르지 않지. 난 시달이 자신의 불행을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아니,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해. 위대한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해. 그건 고귀하고, 멋지고, 당당한 거야. 그것 때문에 누가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어떤 희생을 당하더라도, 멋진 예술이 탄생할 수 있다면 난 신경 쓰지 않아. 인간으로는 쓰레기일지 몰라도, 예술가로는 그게 멋진 거니까.”
그 말에 왠지 ‘눈’이 번쩍 뜨였다. 은하는 그 말을 들은 직후 한 말에 대해 한동안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은하는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평생 그 말에 완벽하게 수긍하며 살아갈 수 있어?”
당시 준호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씩 웃고 은하를 안으며 말했을 뿐이다.
“당연하지. 너나 이런 나에 대해 수긍하는 게 좋을 거야.”
“정말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은하의 말에 현준호는 거들먹거리며 한껏 폼 잡으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냐? 자존심? 장난해? 시대에 남을 예술을 위해선 인생도, 심장도, 목숨도 내놓을 수 있어야지. 내 생각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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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를 죽여줘.”
그의 말에 깊이 응축된 증오 때문에 은성의 몸까지 떨려왔다. 그의 말은 아주 진지하게 진심이었다.
현준호가 처음으로 ‘은성’을 보고 ‘은성’으로서 그를 안은 것. 바로 이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오싹함에 온몸이 얼어붙으면서 그의 행위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수축을 느낀 현준호는 오히려 더 흥분한 듯 더욱 거칠게 들이박으며 머리카락을 세게 쥐고 당겨 그의 귓가에 바짝 입을 갖다 대고, 심장에서 솟구친 듯한 진심을 담아 말을 쏟아냈다.
“그 여자를 죽여줘. 나는 못 죽여. 그 여자를 증오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그 여잘 증오해. 그 여자의 그 어떤 것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미칠 정도로 그 여잘 증오해. 그 여자만 안 만났어도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그 여잘 죽여줘. 아니, 너밖에 그 여자를 죽일 수 없을 거야. 너만이 그 여잘 죽여도 아무 탈이 없을 거야. 넌 금성의 동생이니까. 그러니까 그 여잘 죽여줘. 난 못하니까 네가 죽여줘. 넌 날…… 사랑하잖아.”
그 말과 함께, 현준호는 마지막으로 파정했다. 현준호의 말에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은성은,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듯 떨며 엎드린 자세 그대로 일어나질 못했다. 그런 은성의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현준호가 말했다.
“네 형의 일…… 미안해. 그 빚은…… 곧 내 손으로 갚아줄게.”
그리고 그는 바로 옷을 입고, 바로 나갔다.
그때 은성은 현준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 전에 오늘 그가 한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그의 말이 온몸으로 박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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