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은 “찬양의 책”이다. 그렇기에 시편 1편은 “찬양의 시”이다. 시편 1편의 전체 구도는 “의인들”과 “악인들”을 극명하게 대조시키지만, 그들을 분리해서 다루시는 주님께서 시의 주체이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의인에게는 보상하시고, 말씀을 거부하는 악인에게는 심판을 행하신다. 본 시편은 이 단순한 진리를 부각시켜서 보상과 심판으로 의인과 악인을 영원히 분리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찬양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간계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도다』(1절). 이곳 1절에서『복 있는』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쉬레”는 “행복”이란 뜻이다(창 30:13). 시편 1편은『복 있는 사람』, 곧 “행복한 사람”에 관한 말씀이며, 그렇게 시편 전체의 문을 활짝 열고 있다. 이 1절의 말씀은 “행복의 서곡”이다. 즉 성도 자신이 무엇을 따르고, 어디에 서 있으며, 누구와 함께 앉아 있는가를 살필 때 행복은 시작된다. 자신의 행위를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들과 서성대지 않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과 교제하지 않을 때, 즉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별되어 살 때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앞선 1절은 세 유형의 죄인들을 제시한다. “간계를 부리는 악인들,” “죄의 길에 서 있는 죄인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조롱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이것은 성도가 세상의 영향을 받아 타락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즉 어떤 일로 악인들의『간계』를 따르면 다음엔 죄인들의『길』에 서게 되고, 그다음엔 조롱하는 자들의『자리』에 앉게 되어 성경과 하나님을 조롱하게 된다(벧후 3:1-5). 배교는 이렇게 진행된다. 성도는 앉고(sit), 서고(stand), 걷는(walk) 순서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악인들의 간계를 따르고(walk), 죄인들의 길에 서고(stand),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는(sit) 영적 퇴화의 과정을 밟는다.
주님 안에서 행복해야 할 성도가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타락하는 주요 원인은, 그가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2절은 말씀하고 있다.『그의 즐거움이 주의 법에 있으니, 그가 주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본문 2절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높이고 있다(시 138:2). “행복한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손에 “성경”이 있어야 한다. 낮에 읽은 말씀을 밤에도 생각하고 묵상하는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즐거움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자신이 묵상한 말씀을 하루의 삶을 사는 동안 내내 생각하고 그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며 하루의 발걸음을 조심한다(시 119:9). 이것이 그의 “행복”이다. “행복한 사람”은 주의 말씀으로 ① 죄에서 돌이키고, ②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현명하게 되며, ③ 매순간 기쁜 마음을 지니고(살전 5:16), ④ 말씀으로 지성의 눈이 밝아져 영적인 일들을 깨달으며(엡 1:18,19), ⑤ 또 순결하고, ⑥ 참되고 의롭게 행하며, ⑦ 꿀보다 더 단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모하며 하루를 보낸다(시 19:7-11). 그렇게 말씀으로 시작하여 말씀으로 하루를 끝내는 것이 그의 “행복”이다.
--- p.11~13
시편 22편은 “아옐렛 샤할”이 표제이다. 이 표제는 “아침의 암사슴” 또는 “새벽”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아침”을 언급함이 분명한 것은 “밤중”에 해당하는 십자가 처형(1-24절) 뒤에 이어지는 “25-29절”이 “아침”이기 때문이다. 25-29절은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이며, 이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의의 태양』(말 4:2)으로서 떠오르시는 아침이다. 본 시편은 십자가 처형이라는 암울한 예언과 달리, 주님께서『의의 태양』으로서 떠오르시는 “재림의 아침”을 그 표제로 한 것이다. 본 시편은 ① 십자가 처형(1-21절)과 부활(22절) ② 야곱의 고난의 때(23,24절) ③ 천년왕국(25-29절) ④ 교회 시대(30,31절)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버리셨나이까?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시며 나의 신음하는 말들을 멀리하시나이까?』(1절) 주님의 십자가를 예언한 시편 22편은 1절부터 우리를 갈보리 십자가의 외침으로 인도한다.『제구시경에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질러 말씀하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라』(마 27:46). 다윗은 그가 시편을 기록하던 때로부터 약 1,100년 뒤에 있을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외침을 정확히 기록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기록한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딤후 3:16). 다윗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며, 그 십자가에서 들려올 그 처절한 음성을 알았겠는가?시편 22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 분명하다!
『오 나의 하나님, 내가 낮 동안에 부르짖으나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며 밤 동안에도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나이다』(2절).『나의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보여 준다.『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분이라면 하나님은 “나의 소유”가 되신 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왜 “나”의 부르짖음에 밤낮 귀를 닫고 응답하지 아니하실까?『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사 59:2). 예수 그리스도의 “버림받으심”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주님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죄”로 인해 잠시 외면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순간 그 아들을 외면하셨고, 아들께 “죄”에 대한 모든 진노를 쏟아부으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찬양 가운데 거하시는 오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3절). 이스라엘의 찬양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은 찬양이 불려지는 곳에 거하심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신 곳은 “성막”이다. 따라서 찬양은 “성막”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성막에서 불려지는 찬양 가운데 거하셨다.
--- p.105~107
시편 34편은 「다윗의 시, 그가 아비멜렉 앞에서 자기의 행동을 바꾸었을 때, 자기를 쫓아내자, 그가 그곳을 떠나서.」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총 22구절로 이루어져 있는 본 시편은 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초청함(1-10절)과 ②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침(11-22절) 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편 34편은, 사울왕으로부터 도망치던 다윗이 가드 왕 아키스에게로 피신하지만 거기서도 도피처를 찾지 못한 채 가까스로 도망친 상황에서 기록되었다(삼상 21:10-22:1). 아키스 앞에서 미친 척하고서 도피한 다윗은 그 뒤 아둘람 굴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에 형들과 아버지의 온 집, 고난에 처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 불만을 품은 모든 자가 모여들게 된다(삼상 22:1,2). 본 시편은 바로 그때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제에 이름이 언급된 아비멜렉은 카이사나 파라오 같은 왕의 호칭이며, 이 아비멜렉의 이름은 아키스이다(삼상 21:10).
다윗은 시 도입부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초청한다.『내가 항상 주를 송축하리라. 그를 찬양함이 계속해서 내 입에 있으리로다. 내 혼이 주를 자랑하리니 겸손한 자가 듣고 기뻐하리라. 오, 나와 함께 주를 찬미하라. 우리 함께 그의 이름을 드높이자. 내가 주를 찾았더니 그가 나를 들으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그들이 주를 바라보고 광채가 났으니 그들의 얼굴이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도다』(1-5절). 다윗은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주를 찬미하고 “함께” 그 이름을 드높이자고 다른 이들에게 권하고 있다. 고난과 두려움에서 건져내 주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함은 물론, 그분을 실제적으로 사랑하고 실제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분을 그들도 사랑하길 원하고 그들도 좋아하길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마음에 품지 않고서는 주님을 송축함과 찬양, 주님을 자랑함과 찬미와 드높임에 대해 입도 뻥긋할 수 없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항상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엡 5:20), 만물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리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시 148편). 말하자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 p.175~177
시편 65편은 「악장에게, 다윗의 시와 노래」가 그 표제이다. 다윗의 시인 본 시편은, ① 유대인 환란성도들의 응답받는 서원 기도(1절), ② 천년왕국 때 주님께 나아가는 민족들(2절), ③ 죄가 제거되는 이스라엘(3절), ④ 천년왕국 성전의 아름다움에 만족하는 유대인들(4절), ⑤ 아마겟돈 전쟁과 천년왕국에 관한 묘사들(5-7절), ⑥ 천년왕국의 즐거운 아침과 저녁(8절), ⑦ 하나님의 강으로 크게 풍요케 되는 천년왕국의 땅(9-13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 하나님이여, 찬양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니 서원이 주께 이행되리이다』(1절). 찬양이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표현이 무척이나 독특하다. 찬양을 드리는 성도가 찬양의 대상인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뜨겁게 녹아 있는데, 여기에는 모종의 서원이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나도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는 것이 “서원”이다. 본문에서 찬양은 서원 기도가 응답된 것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다. 대환란 때 유대인 환란성도들은 주님께서 적그리스도의 박해로부터 구원해 주시면 주님만을 하나님으로서 믿고 섬길 것이라고 서원할 것이다.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에 대해 찬양보다 더 나은 반응은 없다. 시온은 찬양이 금세라도 터져 나올 듯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기도가 응답되면 찬양할 준비를 하고 있는 성도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 찬양의 건반 위에는 손가락이 이미 가지런히 올라가 있고, 현악기의 현 위에는 벌써부터 활이 맞닿아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끓어오르는 확신으로, 마음속에서는 이미 찬양이 힘차게 연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가리이다』(2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육체의 기도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로마카톨릭의 마리아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본문에서는 모든 육체가 주님께 기도하러 나아가고 있지만 지금껏 그런 적이 없었다. 그것은 천년왕국 때 벌어질 일이다.『마지막 날들에 주의 전의 산이 산들의 정상에 세워질 것이요, 작은 산들 위에 높아지리니 모든 민족들이 그곳으로 몰려들 것이라』(사 2:2).『정녕,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계신 만군의 주를 찾으러 와서 주 앞에 기도하리라』(슼 8:22). 재림하시어 예루살렘의 보좌에 앉아 철장으로 통치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민족들은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전쟁이 아닌(사 2:4) 그분의 말씀을 배우려고『야곱의 하나님의 전』(사 2:3)으로 몰려들 민족들을 상상해 보라! 시온에서 찬양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바로 그곳에서 선포될 율법을 듣고자 운집하게 될 민족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인간의 길이『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잠 14:12)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뒤늦게야” 깨닫고 서둘러 몰려들 것이다. 현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깨닫고 실행하는 삶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현재 깨달은 진리를 정결한 믿음으로 실행한 성도는 장차 그 민족들을 통치하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천년왕국의 철권통치 아래에서가 아니라, 교회 시대의 은혜 아래에서 진리를 자유롭게 실행한 성도는『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그분의 영광 속에서 민족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요일 3:2,3).
--- p.269~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