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는 그 유명한 『95개 논제』를 썼다. 이후 그 ‘논제’는 습자지에 먹물 번지듯 독일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절묘하게도 그즈음 이미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어 있던 구텐베르크 인쇄기 덕분이었다. 효과는 놀라웠다. 마치 철저히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독일 전역에서 면벌부 판매를 반대하는 물결이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Karl V, 재위 1519~1556)는 마르틴 루터를 제국회의에 소환했다. 그가 내건 『95개 논제』 철회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보름스 제국회의(Diet of Worms, Reichstag zu Worms)의 ‘마르틴 루터 심문 사건’이다. 이는 1521년 4월 17일의 일이다. 제국회의가 열렸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각지에서 모여든 제후들이 차례로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대쪽 같은 성정에 담이 큰 루터도 이때만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손바닥에 자꾸 땀이 배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루터의 비서이며 신교도이던 여성이 도기로 만들어진 1리터들이 맥주잔을 들고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잔을 받아 든 루터는 단숨에 벌컥벌컥 맥주를 마신 뒤 의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의 두 뺨에는 홍조가 번져 있었다. 이후 마르틴 루터의 격정적인 연설과 뚝심 있는 행동은 유럽 종교사, 그리고 세계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 p.23~24, 「19세기에 아메리카로 수출된 독일 아인베크 맥주병 라벨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까닭」중에서
한데, 흥미롭게도 오래전부터 영국에서도 거의 100퍼센트 같은 검사법이 시행되어 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판정 결과는 정반대였다. 영국에서는 가죽 바지에 벤치가 달라붙으면 불합격 판정을 한 것이다. 이유가 뭘까? 이 경우 맥주의 발효가 끝나지 않아 쓸모없는 당분이 남아 있기 때문으로 판단해서였다. 어찌 됐든 두 경우 모두 기술적인 관점에서 판단할 때 근거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두 경우 중 어느 쪽이 좀 더 타당할까? 영국 쪽이다. 당대의 영국에는 영주가 임명한 맥주 감시관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 맥주 감시관의 직함은 ‘에일 코너(Ale conner)’였다. 에일 코너는 11세기부터 런던을 중심으로 활약해 왔을 정도로 연륜이 깊다. 그들의 주된 업무는 맥주 양조장을 방문하여 맥주의 품질을 검사하는 일이었다. 그 다양한 검사 방법의 하나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가죽 바지 시험’이었다. 에일 코너에게는 부정행위를 한 것으로 의심되는 양조업자를 적발하여 재판소로 넘길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John Shakespeare)가 에일 코너였다는 점이다.
--- p.48, 「영국이 낳은 세계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아버지가 ‘에일 코너’, 즉 맥주 감시관으로 일했다는데?」중에서
성벽, 아니 링슈트라세의 안쪽 도시에는 그 중심부에 시장이 들어서고 시청사와 교회가 세워졌다. 시장과 시청사와 교회는 성벽에 의해 둘러싸인 도시를 이루는 하나의 세트와도 같은 존재였다. 시청사 앞에는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광장은 시민에게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소통의 공간 역할을 담당했다. 리고 교회는 시민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역할을 맡았다. 시의 행정을 담당한 주체는 시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였다. 시청 지하에는 식당이 있었는데 의원들 간 교류 공간이자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식당에는 양조장이 딸려 있어 이곳에서 양조된 맥주가 의원들의 식사 시간이나 집회 때 제공되었다. 이런 식으로 지하 식당은 집회 장소의 기능도 담당했다. 이후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청사가 개방되면서 지하 식당은 비어홀·레스토랑으로 꾸며져 시민 교류의 장으로 변모했다. 이제 유럽 도시의 비어홀은 그 지역 집회 장소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나치스가 뮌헨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대연회장을 집회 장소로 선택한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p.68~69, 「나치스는 왜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대연회장을 집회 장소로 선택했나」중에서
제1병동의 산욕열 발병률이 제2병동과 비슷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1847년 이후의 상황이다. 이는 전적으로 제멜바이스가 깨끗이 손을 씻고 철저히 소독하도록 한 덕분이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1848년부터 소독 대상을 의료기구로까지 확대하자 산모가 산욕열로 사망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제멜바이스는 논문을 통해 의사의 손이 산욕열을 전염시키는 매개체가 되어온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산욕열을 예방하려면 염소수를 이용한 소독이 필요하다는 점을 호소했다. 그러나 의사회는 “의사를 살인자 취급하다니!”라고 거세게 비난하며 그를 의사회에서 추방해버렸다. 결국 제멜바이스는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하는 모욕적이고도 참담한 일까지 당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질게 학대받는 과정에 생긴 상처가 원인이 되어 감염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잔혹한 운명에 농락당하면서도 인류를 구원한 비운의 천재였다.
--- p.102~103, 「의사의 손이 산욕열을 전염시키는 매개체가 되어온 사실을 밝혔다는 이유로 의사회에서 추방당한 제멜바이스」중에서
바빌로니아인들은 스무 종류의 맥주를 양조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자면, 여덟 종류 보리로 만든 맥주, 여덟 종류 에마르밀로 만든 맥주, 그리고 두 가지 원료를 섞어서 만든 네 종류의 맥주가 그것이다. 당시 바빌로니아에서는 홉 대신 약초의 일종인 개곽향(꿀풀과의 여러해살이 풀―옮긴이)을 사용했다. 바빌로니아에서도 수메르인처럼 모든 시민이 정해진 양의 맥주를 배급받았다. 그리고 역시 수메르에서처럼 계층과 신분에 따라 배급량의 차이를 두었다. 구체적으로, 노동자는 1일 기준 2리터, 중산 계급에 속하는 관리는 고농도 맥주 3리터, 상류 계급에 속하는 상층 신관에게는 5리터의 고농도 맥주가 배급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바빌로니아에서 맥주 양조 기술자를 지위가 높은 신관과 동등하게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바빌로니아 왕 중 가장 유명한 함무라비 왕이 만든 법은 매우 유명하다(인류 최초의 법전은 수메르 우르 제3왕조의 우르남무(Ur?Nammu) 법전이다). 높이 2.5미터 섬록암으로 만들어진 원통형 돌기둥 법전에는 맥주에 관한 법률이 새겨져 있다. 이로써 당시의 맥주가 국가의 중요한 재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p.103~104, 「고대 수메르인은 맥주로 세금을 납부했으며, 도시와 국가는 노동의 대가로 맥주를 지급했다는데?」중에서
당대의 에일 하우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 이상한 것을 탄 맥주가 판매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양을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술에 취한 손님이 지갑을 도둑맞거나 분실하는 일도 잦았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의 에일 와이프가 남성들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던 터라 어쩌다 그들의 부정직하고 파렴치한 행위가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엔 엄청난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며 그 실망은 고스란히 분노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사례가 있었다. 맥주에 물을 타서 양을 속이다가 들킨 사례인데, 이 일로 그 에일 와이프는 화형당했다. 다음은 그가 화형대에 오르기 전 읊조렸다고 알려진 참회의 시이자 노래다.
나의 맥주잔은 엉터리라네.
내가 만들었다네.
많은 사람이 감쪽같이 속았다네.
나는 물 탄 에일을 사람들에게 속여 팔았다네.
에일 와이프가 차츰 사라지고 남자가 에일 전문가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 사건 이후부터였다.
--- p.120, 「맥주에 물을 타서 양을 속이다가 들켜 화형에 처해진 에일 와이프 이야기」중에서
이렇듯 대범하고도 파렴치한 스파이 행위를 한 그 젊은 신사는 누구였을까? 가브리엘 제들마이어 2세다. 그는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그의 부친 가브리엘 제들마이어 1세가 맥주 양조에 관한 견문을 넓히고 기술을 습득하라는 취지에서 영국으로 유학을 보낸 일의 여파였던 셈이다. 1830년대의 일이다. 당시 영국 경제는 증기기관차가 등장하고 상용화하면서 엄청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버튼과 글래스고(Glasgow) 부근의 맥주 양조장은 고유의 기술을 훔치려는 뮌헨 양조가들의 주요 타깃이 되고 있었다. 그런 터라 영국의 맥주 양조가들은 독일인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주도면밀하게도, 당시 제들마이어 2세는 혼자 몸으로 그곳에 침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빈 출신의 친구 안톤 드레어와 함께 그 일을 모의했고 샘플을 몰래 채취해 밖으로 빼내는 데 성공했다. 가브리엘 제들마이어 2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여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 비밀리에 채취한 맥아즙 샘플을 작은 병에 담아 서둘러 가겠습니다.” 제들마이어 2세의 맥주 샘플 훔치기 일화에 관한 다소 긴 내용을 여기에 인용한 데는 그럴 만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놀랍게도,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가브리엘 제들마이어 2세와 그의 구 안톤 드레어는 오늘날 전 세계를 주름잡는 맥주 제조업체를 일군 인물들이자 ‘라거 맥주의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이 과하지 않은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 p.212~213, 「전 세계를 주름잡는 맥주 제조업체의 설립자이자 ‘라거 맥주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제들마이어 2세와 안톤 드레어가 영국의 맥아즙을 훔친 산업 스파이였다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