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의식한다는 것은 어쩌면 들리는 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일지 모른다. 길을 가다가 보면 들리는 소리가 있다. 그 소리는 인격성을 부여한다. 그러한 들리는 목소리를 의식하면 길은 부름으로 다가온다.
--- p.34
뒷골목과 변두리는 명목적인 공언된 선전과 포장된 모습이 보이는 전체가 아님을 드러내고 다른 현실이 있음을 나타내 준다. 변방은 계시의 장소로서, 힘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현실을 자각하는 장소로서는 안성맞춤의 장소인 셈이다.
--- p.48
길을 걷는 자는 하느님의 집에 제단을 차리는 것보다 함께 있던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고, 오그라든 손을 펴게 해서 성하게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날이 거룩한 시간, 곧 안식일이 되게 한다. 이렇게 거룩한 시간의 성별과 세속적인 일상 시간의 경계선은 그 장벽이 무너져 길을 여는 시간이 되게 한다.
--- p.67
이처럼 길 가기는 공간과 시간의 차이에 대한 섬세함을 사는 것만 아니라 관계의 재편도 요구받는다. 외부인과 내부인과의 관계 맺음도 ‘포함 대 거리두기’의 재배열이 일어난다. 아웃사이더와 타자를 관계에 있어서 새롭게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고 이름 붙이기를 하는 것은 길 걷기에 있어 매우 파격적이고 치열한 수행이다.
--- p.86
신이 많은 것을 부담스럽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밖에 나가 뭔가 심고 노력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 안의 등불을‘ 됫박 아래나 침상 밑에’만 두지 않고 옮겨 두기만 하면 되는 손쉬운 일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 p.97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저 위가 아닌 이 지상에서 실제적이며,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천천히 존재의 깊은 중심에서 일어난다. 서서히, 마치 빛이 방안 구석구석까지 닿는 것을 막을 수 없듯, 저항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 p.105
길을 가는 자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파동을 일으켜 움직임을 일으킨다. 그러한 움직임은 길을 가는 자에 대한 반응이며 호감을 느끼거나, 간절해지거나, 아니면 비판과 분노의 움직임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한 존재가 올곧이 길을 가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슈가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이슈가 될 수 있다.
--- p.107
그러므로 본래 기적은 밖으로 나있던 길을 내면으로 끌어들여 영혼의 길을 내게 하려고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그 기적이 당신을 길가게 하는 데 더욱 지혜와 힘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 내면의 길에로의 그리움을 촉발하는 영혼의 부싯돌이었음을 알아듣는다.
--- p.131
구경꾼이자 관찰자로 자신을 예수의 메시지에 대해 거리를 두며 본 사람들은 즉 밖에 있는 자는 질문은 할 수 있으나 그에 대한 진실의 대답을 얻을 수는 없다. 자기 실존을 거기에 거는 ‘길’에 대한 영혼의 갈증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빗나가는 질문의 화살이 활에서 당겨져 나갔으나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 p.142
마가의 제자도는 예수의 길을 본받음을 통해 함께 그러한 사회적 관계의 분리를 통합하고, 저편화하는 악마를 제어하고 이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마음과 신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실질적인 권세 행함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실재로서 서서히 드러나게 한다.
--- p.161
역설하자면, 그렇게 비통하고 힘든 현실과 상황에 대해 돌봄의 정치/실천을 행하는 것은 무언가 특별한 계시적 징표에 대한 능력에 있지 않고 보고 듣고 마음을 내는 자각적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하늘의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실천의 기적을 통해 그 징표가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상적인 기적을 위해 귀, 눈, 마음의 정화는 중요한 요건이 된다.
--- p.186
보고 듣고 마음 쓰는 것에 방향이 달라졌을 때, 보이는 것을 통해 그 너머를 보고 듣고 알아들을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여는 열쇠를 갖게 된다.
--- p.186
위험한 시기는 계시의 시기이며, 자신의 전 실존을 흔드는 혼돈과 어둠의 에너지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틈이 생기면서 무언가가 새롭게 보이는 길이 열린다. 길가는 자의 뒤따름을 택한 사람들은 이렇게 드러난 것과 감추인 것 사이의 역설에서 눈뜨고 귀 열어 듣고자 마음을 열어야 할 필요가 있다.
--- p.218
그렇게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게 하는 것은 실상 기존의 힘에 대한 중독과 마취상태에 의한다. ‘깨끗한 마음’ 혹은 ‘순전한 마음’의 기반 없이는 그 중독과 마취 상태를 해체하기가 힘들다.
--- p.252
마가의 제자직에 있어서 사람의 아들됨·그리스도의 의미는 단순히 고백이나 교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여전히 예수의 행로를 함께 모호하게 걸어가면서 기존의 권위를 내려놓고 새로운 의식과 경험이 명료해질 때 찾아온다는 점에서 끝까지 가봐야 비로소 그분이 누구이고,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를 또한 알게 될 것이다.
--- p.323
갈릴래아로 되돌아가는 비전을 다시 무덤이라는 인생 종착지의 끝에 세움으로써 그들은 환상을 넘어 진실의 비밀,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예수는 움직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길 걷기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예수를 육화시킨다. 누군가 어떻게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짓느냐고 물어보거든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리라. 예수는 길 걷는 자의 움직임 속에 있다고. 이것이 진정한 부활이다.
--- p.412
길 가기의 ‘내면성’인 ‘하느님의 뜻’의 실천은 일상의 권력에 직면해서 ‘공동체의 작은 자들을 위한 헌신’이라는 공적 소명과 연결되어 있다.
--- p.417
예수는 자신의 삶을 길 가기라는 일관성을 통해 사셨고, 이제 그다음은 그의 스토리를 들은 나의 차례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나타나심’은 예수의 소생에 대한 객관성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체성과 실존적인 응답이라는 상호관계성이 그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 p.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