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자꾸 제 말을 씹어요.”
이 자식이, 이 말이 선생님에게 할 수 있는 말일까 생각하다가도 그는 받아주었어. 그가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께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어. 지금도 곧잘 연속극에서는 어디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거야, 라는 대사가 나오지만, 그때는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도 시도하지 않았어. 그저 학생은 선생님의 말씀이 진리인 양 듣고 받아들이기만 했지. 그는 속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었어. 꼰대라고 할 수 있지.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이후의 삶을 지배하는, 유년 시절을 기억한다고 할 수 있지. 찬 기후에서 배아 시절을 보낸 가문비나무들은 어김없이 다른 나무들보다 버트 세트를, 첫서리가 내릴 것에 대비해 성장을 멈춰. 더 길고 추운 겨울을 대비하는 거지. 호프 자런의 연구가 맞다면 말이지.
“네가 타이밍을 잘 못 맞추는 거야.”
“타이밍이라. 타이밍!”
윤이는 절망하는 체했어. 적어도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으니까. 누구라도 자신의 말이 이렇게 비껴가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기는 어렵지.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다고 말하지. 아니 윤이는 정말로 절망했는지도 몰라. 확신할 수 없었던 그는 서둘러 수업을 진행해야 했어.
“저는 인제 국어 시간에는 절대 발표 안 합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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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지가 아역 탤런트를 했다는 말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자세히 보는 버릇이 생겼어. 날씬하지는 않았지만 피부도 하얀 편이라 금방 눈에 띄었어. 이 애는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거야. 보기만 해도 명랑하고 귀여운 모습을 금방 찾아낼 거야. 하지만 나쁜 배역을 맡을 수밖에 없다면 이 애는 어떻게 할까? 아마도 눈을 부라리며 이따위 배역을 내가 하라는 말인가요, 하며 대들지 않을까. 철없이 인신공격할지도 모르고. 그런 장면을 본 사람들은 이 애에 대해 말만 나와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될 거야. 그래, 넌 아무리 친한 사람에게라도 배려라고는 없이, 비판적이 될 수 있지. 불리한 상황이 되면 결점을 찾아내 독설을 퍼부을 거고.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근거가 있어. 영지는 학교에서, 그것도 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께 따지고 들어 전교생들의 비난을 산 일도 있거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그도 영지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어. 전말도 모르면서 학생에게 나쁜 선입견을 품고 싶지 않았거든. 그러나 당사자가 되자, 그도 마음이 달라지고 있었어.
그날따라 영지는 조용했지만, 진이에게 책 읽기를 시켰더니 귀찮아하는 것이 영 성의 없어 보였어.
“그만 됐어. 읽는 게 그게 뭐야?”
그의 말에 진이도 지지 않았어.
“그럼 나한테 시키지 말아야지요.”
그는 진이의 귀에 들리게 한숨을 쉬지는 않았어. 국어는 읽기가 기본이라는 생각 따위는 이제 하지 말자구. 아이들이 글자를 모르는 애들도 아니고. 읽어 주면 고맙다고 생각해야 할 거야.
--- p.50
"자식들, 지금부터 스마트폰을 만지거나 잡담하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겠다!“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그는 자습을 시킨 것이 잘못이라고 나중에 몇 번이나 생각했어. 금방 산만해지는 아이들에게 자습이란 괜한 짓이야. 선생 편하자고 하는 짓이야.
그가 보기에 아이들은 선생에게 겁을 내야 했어. 과거에는 선생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런데 요즘 중2 정도 된 애들은 선생을 겁내지 않아. 이제 선생이나 부모가 만만하게 보이는 때가 됐거든. 그때까지 권력을 쥐고 부를 누리며 각계각층에서 목에 힘을 주던 사람들이, 고졸 출신이라고, 소탈한 노무현 대통령을 만만하게 보고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었듯이. 아마 그들은 대통령이라고 인정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고 있었어. 언론이고 검찰이고 곳곳에서 그분이 어떻게든 못되기를 바라고 마구 흔들어 댔어. 그래야 다음 차례에 자신들이 나설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녀석들은 일개 학원 강사인 그를 만만하게 보았어. 그것이 그를 좋아한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었어.
조금 숙연해지려고 할 때 분위기를 깨는 것은 꼭 하이드였어. 옆에 앉은, 체구가 작은 아이 어깨를 만지며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 왜 입을 열어?"
그는 하이드가 ADHD나 자폐가 아닐까, 생각한 적은 있지만 침묵을 지켜야 할 순간에 분별없이 입을 열 줄은 몰랐어. 이런 순간의 압박감을 하이드는 견디지 못할까. 그때는 그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괜찮냐고 그냥 물어봤어요?"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왜 조용히 하라는데 입을 열었느냐는 말이다."
"괜찮냐고 물어본 것도 죕니까?"
그는 하이드 말에 당황했어. 전혀 예상치 않은 반응이었거든.
--- p.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