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인물, 문중, 역사, 풍습에 관한 이야기다. 가장 많이 참조한 것은 왕조실록과 여러 문집이다. 실록은 너무 방대하여 검색어로 주로 활용했고, 조상이 지은 문집은 서문과 발문을 꼭 읽어보고 탐나는 글귀는 기록해 두었다가 글 어딘가에 인용했다.
역사는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과거는 먼저 온 오늘이요 조상은 앞서 산 우리들이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조상으로부터 찾으려고 했다. 조상이 전해주는 기맥(氣脈)은 내 몸 안에 여전히 살아있다고 했고 이 몸은 선조의 몸이라 했다. 우리 역사는 그저 대들보와 서까래로 엉성하게 엮어놓은 것이 아니라 씨줄과 날줄로 단단하고 곱게 짜여 있다. 왕조사가 씨줄이고 씨족사가 날줄이다. 책에서는 역사의 한 축인 씨족이 주된 소재가 됐고 씨족의 중심인 종가를 조선의 얼굴이라고 썼다.
--- 머리말에서
조선사를 연구한 미국 하버드대학교 에드워드 와그너(1924~2001) 교수는 우리나라 반촌지역을 ‘초승달 모양의 양반지대’라 표현했다. 반도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진 비옥한 충적평야에 형성된 동성부락지대가 초승달 형상과 같다고 했다. 그 시작점이 영남이었다.
--- p.58 「영남세가와 불천위 제사」중에서
숙종 20년(1694년)은 영남 남인이 마지막으로 피 흘린 해였다. 갑술환국이라 일컫는 그해 이후 백 년 동안 영남인은 미천한 시골선비로 취급받으며 과거급제 하여도 당상관 보임은 하늘의 별따기였고 참상(參上, 3품에서 6품)조차 되기 어려웠다.
삼십 년 뒤 이인좌 난(1728년)에 반역향으로 낙인찍혀 영남 양반가문 대부분은 중앙 진출의 꿈을 버리고 농토에 기반을 둔 재지(在地)사족이 되어 향촌을 지켰다. 정조가 등극하고 십여 년이 지난 1788년 채제공이 우의정 되어 국정을 이끌자, 정조는 영남인을 달래고 우군세력으로 키우기 위해 경주 숭덕전과 도산·옥산서원에서 치제(致祭, 왕의 제사)를 지내고 도산서원에서 영남별시(특별과거)를 열었다.
--- p.68 「조선 선비의 거룩한 분노, 만인소」중에서
1762년 영조 38년 윤오월 13일, 영조는 대리청정하고 있는 왕세자이자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7월 염천에 뒤주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이 사건이 조선 오백 년 왕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임오화변(禍變)이다. 이 참혹한 현장을 처음부터 목격한 영남 선비가 있었는데 세자에게 『역경』을 가르친 시강원 관리 권정침이다. 화변의 그날에 세자를 비호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으로 형장에 끌려갔고 특지로 풀려나 낙향했다. 하늘 보기 부끄러워 세상과 담을 쌓고 그날의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서연일기』이다.
--- p.74 「영남 선비는 왜 사도세자를 위해 목숨을 던졌는가」중에서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고려시대부터 사고(史庫)를 지었는데 내사고와 외사고가 있었다. 내사고는 고려·조선 모두 궁궐에 두었고 고려시대 외사고는 절집에 두었다. 1439년(세종 21년) 사헌부는 시무에 관한 개선책을 올리면서 고려 사고가 충주 개천사에만 있어 널리 간직하지 못한 채 병화를 만나 옛 문적이 적고 고려 사적 또한 잃은 것이 많다며 명산에 사고를 지어 분산토록 건의하자 세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세종은 남쪽 삼도(三道)에 외사고 하나씩, 기존 충주사고 외에 전라도 전주, 경상도 성주에 추가로 짓고 1445년 태조·정종·태종실록을 등사하여 보관했다. 이로써 왕조는 4사고 체제를 갖추게 됐고 중종 때 성주사고가 불탔을 적에도 바로 바로 복원이 됐으며 임진병화로 춘추관·성주·충주사고가 불탔지만 전주사고가 남아 역시 복원됐다.
--- p.108 「위대한 유산 왕조실록과 다섯 사고」중에서
벽진 이씨 노촌 이약동(1416∼1493)은 김천 양천동 하로마을 출신으로 1470년 성종 1년에 55세 나이로 제주목사에 부임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관청 주도로 국태민안을 비는 한라산 산신제를 정상 백록담에서 봉행했는데 그때마다 적설과 한풍으로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노촌은 한라산 중턱에 있는 소산오름 곰솔 밭에 산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내도록 했다. 그 이후부터 동사하는 백성이 없어 칭송이 자자했다.
아울러 조정 공물을 감해 백성 부담을 줄인 선정이 실록에 남아있다. 성종은 제주 백성이 공물로 인한 고충이 적지 않다며, 노촌의 장계대로 노루 가죽은 50장에서 10장으로 줄여 공납하고, 진주는 얻는대로 올리라고 했다.
노촌이 임기를 마치고 제주도를 떠날 때 재임 중 사용한 기물은 모두 관아에 두었고 손에 든 말채찍조차 관물(官物)이라는 이유로 읍성 문루에 걸어두었다. 이 일은 후임 목사들에게 아름다운 경계(警戒)가 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채찍이 없어진 후에는 백성들이 바위에 채찍 모양을 새겨 이를 기렸는데 이 바위를 괘편암(掛鞭岩)이라 불렀다.
그리고 제주도를 떠날 때 배가 갑작스러운 풍랑으로 뒤집힐 위험에 처하자 노촌은 “나의 행장에 떳떳지 못한 물건은 하나도 없는데 누가 나를 속이고 욕되게 하여 하늘이 나에게 벌을 내리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제주 군교들이 전별 선물로 몰래 실은 갑옷을 찾아내 바다에 던졌다. 이것이 유명한 투갑연(投甲淵) 고사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실려 있다.
--- p.152 「제주의 전설이 된 영남 목민관」중에서
역사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신의 이야기인 신화와 달리 역사 속에는 인간 심성이 알알이 박혀있다. 임금에게 미움을 받으면 유배를 갔고 집안 간 원한이 맺히면 왕래를 끊고 담을 쌓았다. 이를 세혐(世嫌)이라 하여 기록으로 남겨 후손에게 전했다.
--- p.185 「선비사회의 유배와 사랑」중에서
고려·조선의 왕들은 중국 황제를 따라한다고 걸핏하면 신하를 귀양 보냈다. 『조선왕조실록』에 귀양이란 단어가 5,000여 회, 유배가 3,200여 회가 나온다. 유배지는 수도를 기준으로 멀면 멀수록 급이 높았다. 삼천리 유배지란 말까지 생겼다. 제주도 대정이 가장 멀었는데 추사 김정희와 동계 정온이 귀양살이를 했다.
경상도 역시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므로 많은 선비들이 유배를 왔다. 정몽주가 언양, 윤선도가 기장, 정약용은 장기, 송시열은 장기와 거제, 권근과 오시복이 영해, 이색이 평해, 이극균이 구미, 민무질이 태종 때 대구로 유배를 왔다. (중략) 선비들은 유배지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정약용의 강진 제자들은 다산학단을 만들어 지역사회에 문풍을 일으켰다. 포항 장기로 3년 7개월간 유배됐던 송시열의 영향으로 장기에 서원이 7개나 생겼고 노론세가 강했다. 청도 선비 박태고는 송시열을 찾아 거제도까지 가서 제자가 되었다.
--- p.185 「선비사회의 유배와 사랑」중에서
당나라 시인 왕유의 ‘객사청청류색신(客舍靑靑쐍色新)’ 한시 구절이 우리에게 익숙한 탓인지 객사를 숙박시설로 인식하고 안내문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조선왕조 객사는 숙박시설이 아니다. 숙박은 고을에 별도 지어진 객관이나 역참을 이용했다. 고려사에 객사는 관아, 객관은 숙박시설로 분명하게 구별돼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객사는 전패와 국왕 관련 이야기만 나오고 사신이나 관리 숙소로 객관이 수백 번 넘게 언급된다.
먼 길을 온 사신이나 관리가 하룻밤을 유숙하며 한잔 술로 여독을 풀어야 하는데 고을 수령이 직을 걸고 관리하는, 국왕 전패가 모셔진 건물에서 여장을 풀고 한잔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 사료를 검증하지 않고 한자 뜻풀이로 용어를 혼용한 듯하다. 물론 작은 고을에서는 객사의 좌·우익헌을 잠시 객관으로 사용하기도 했겠지만 기단이 높고 신전처럼 웅장하게 지은 객사와 아늑하고 포근한 잠자리 위주의 객관을 동일시하는 것은 맞지 않다.
--- p.225 「고을의 조건, 객사 관아 향교」중에서
호남은 음식, 서울은 출사(出仕), 영남은 집짓기라 했다. 호남은 물산이 풍부해 음식문화가 발달했고 서울 사족은 관리가 되어 조정에 들어가는 것이 평생 목표였고 영남 사족은 집 짓기로 일생을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경상도는 한옥의 고을이다. 문화재로 등록된 한옥의 65%가 경상도에 있다. 그러기에 동성마을의 얼굴인 종택, 유생의 사립학교인 서원, 묘제를 위한 공간 재실, 선비 쉼터인 정자가 유별나게 많다. 영남 사족은 무엇 때문에 집짓기로 일생을 보냈는가?
--- p.230 「사족士族의 집, 종택·서원·사우·재실·정자」중에서
조선은 씨족사회이다. 풍수에 따라 문호를 연 동성마을이 몇 개 모여 고을을 이루었고 동성마을에는 어김없이 문중 종택이 번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게다가 경상도는 성리학의 종법(宗法)이 유난히 강해 종가 위세가 대단했고 유력문중 종손은 경상감사와 바꾸지 않는다는 말까지 생겼다.
조선 후기 중앙 진출이 사실상 막혀버린 영남 사족은 종가를 중심으로 문중결속만이 자신을 지켜준다는 것을 알았고 보종과 조상숭배는 신앙처럼 강했다. 종가가 번듯해야 문중이 빛난다고 여겼고 개인의 현달은 문중의 자랑이기도 했다.
--- p.231 「사족士族의 집, 종택·서원·사우·재실·정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