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자주,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루는 고되고, 희망은 흐릿하다. 이런 일상, 사소한 취향과 실없는 농담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나의 웃음 탐닉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남들을 웃기는 귀한 재능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웃음의 역치가 매우 낮아 시시껄렁한 농담에도 쉽게 웃음이 터지는 재능만큼은 출중하니, 웃음으로 구원될 복된 세상의 기쁜 백성으로는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하며.
--- p.17
어렵사리 회사가 코앞에 보이는 대로로 접어들었으나, 역시나 기사님은 차를 인도 쪽으로 붙이는 데 실패. 1차로를 달리던 택시가 횡단보도 빨간 신호에 멈춰 서자 아저씨는 몹시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아가씨, 여기서 내리면 안 될까.”
평소보다 3,000원쯤 더 나온 택시비를 건네는데 나도 모르게 뾰족해진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택시 운전 하신 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아이고 미안해, 내가 원래 운전을 잘 못하는데, 이거 말고는할 수 있는 일이 없네….”
--- p.58
그 시절의 나는 뭐가 그리 힘들었던 것일까. 서른 즈음에는 무언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 자신에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을까. 나는 더 빛나는 존재이고 싶은데 빛나기는커녕 회사와 집을 오가며 나이만 먹고 있었다.
--- p.71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 보니 웬걸. 세상에는 너무 예쁘고, 잘나고, 집안도 좋으며, 아무리 용을 써도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스펙을 지닌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때늦은 사춘기가 찾아왔다. 빌어먹을 세상, 욕을 해봐야 소용없고, 마음은 한없이 쪼그라들고, 이런 세상에 내 자리는 없을 거야, 누가 날 좋아하겠어, 난 안 될 거야 아마, 헤매던 시절. 그때, 그 안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내 상황을 남 일 보듯 하기.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냉정하게 파헤쳐 나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기. 아마도 자학이었을 것이다.
--- pp.72~73
삼십대의 우울했던 어느 날, 꽉 막힌 마포대로를 지나가다 불현듯 절망에 사로잡혔다. 빛을 위한 어둠 좋아하네. 나의 어둠은 그저 어둠일 뿐인 거야. 어두운 렌즈로 바라보고 있으니 세상은 이렇게도 온통 깜깜한 것투성이인걸. 진실이 어디에서 어떤 밝기로 빛나고 있는지 이 렌즈로는 도저히 알 수 없을지도 몰라. 누구나 자신만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거라면 차라리 남들에게 ‘뭘 모른다’는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인생을 통째로 뽀샵 처리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 p.90
내 안의 어둠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헤맸던 내가 팀 버튼의 작품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 그는 어둠의 에너지를 어떻게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 누구보다 생생하게 증언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의 작품 중 겨울이면 한 번쯤은 다시 보게 되는 영화 [크리스마스의 악몽]. 참으로 슬픈 내용이다.
--- p.90
사실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른이 되는 것은 과연 어떤 건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어쩌다 보니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어 버렸고, 몸은 조금씩 노화의 징후를 보이는데, 마음은 여전히 말랑해서 작은 스침에도 쉽게 상처가 난다. 이적의 노래처럼 아직은 내 앞에 놓여 있는 삶의 짐이 버겁고 두려울 뿐이다.
--- p.172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스무살의 나와 지금의 나, 분명 지금의 나는 스무살의 나보단 나 자신을 덜 아프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가 갖지 못한, 잘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고 담담히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조금씩, 나 자신과, 세상과 화해하며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마흔이 되어도 쉰이 되어도 여전히 성장통은 있을 테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덜 쓰라리기를 기대하며.
--- p.172
다른 직장인들과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회사로 옮긴 지 일주일 만에, 새벽이면 나도 모르게 눈이 떠지던 습관이 무섭게 사라졌다. 그 후로 ‘아침형 인간’류의 자기계발서를 사고 또 샀다. 하나, 10년이 지나도록 아침형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최근 또 《아침 글쓰기의 힘》을 구입했다. 그리고 ‘성공한 작가들은 아침에 글을 완성한다’는 구절을 지금 새벽 1시 47분 여기에다 적고 있다.
---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