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붓다를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지만, 붓다는 신이 아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통해 우주의 진리를 체득하고, 신을 능가하는 위신력을 가진 분, 즉 신보다 더 위대한 성인이 되신 분이다. ‘신을 능가하는 인간의 완전성’, 이것이 바로 불교라는 인본주의 종교의 핵심이다.
--- p.35
초기 제자들에게 있어 열반은 그들의 목적인 깨달음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사건이다. 그러므로 붓다의 열반은 불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한편 이와 같은 소승의 열반 문헌을 근거로 하여 사상적 지평을 확장하고, 불교의 목적인 깨달음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대승의 열반경이다.
--- p.44
열반은 ‘타는 불을 끄는 것’이나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열반을 ‘완전한 소멸’과 같은 관점으로 보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열반이 완전한 소멸이라면 불교는 소멸을 추구하는 종교가 된다. 그럼 ‘불교의 수행 목적은 소멸인가?’라는 문제가 남게 된다. 한편 완전한 소멸은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행복 추구’의 방향과도 충돌한다.
--- p.79
선남자여! 여래가 방편으로 열반으로 끝나는 것 같은 행을 보이지만, 이는 결코 멸도한 것이 아니다. 선남자여! 이 세계(남섬부주)에 해가 졌을 때 중생들이 보지 못함은 가리어진 것이지, 해는 본래 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중생들이 보지 못하므로 졌다는 생각을 내는 것일 뿐이다. 성문 제자도 그와 같아 번뇌의 산이 가리어 내 몸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보지 못하는 연고로 여래가 멸도한다는 생각을 내지만 나는 진실로 끝까지 멸도하는 것이 아니다. _ 『대승열반경』 권23, 「22.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 p.89
나는 이제 네 가지 의지할 것을 말하리라. 1. 진리란 곧 법성이다. 2. 올바름이란 곧 여래는 항상 존재해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3. 지혜란,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4. 진리가 온전한 것이란, 일체의 대승경전을 통달하는 것이다. _ 『대승열반경』 권6, 「8. 사의품」
--- p.117
불성은 불교 내적으로 두 가지 관점에서 도출된다. 첫째, 대승불교는 부파(소승)불교가 인간의 태생에 차등을 두는 것과 달리, 모두가 노력하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보편성과 평등을 역설한다. 또 이렇게 붓다가 되는 과정에 있는 사람을 ‘보살’이라 칭하는데 문제는 이런 보살이 붓다가 된다고 할 때, 여기에는 나름의 안전 장치, 즉 확증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붓다로서의 가능성인 ‘여래장’과 ‘불성’이다. 즉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미래의 붓다가 된다’는 슬로건에 대한 당위성을 위해 내적 개념인 불성이 대두하는 것이다.
--- p.118
열반이 항상하기 위해서는 열반에 든 붓다 역시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관점과는 다른 비실체성으로 불변하며 영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열반에 든 붓다에게 기원(기도)했을 때, 종교적인 감응과 이적, 즉 가피가 발생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 p.121
붓다의 평등주의는 기원 직전에 대두하는 변화와 계몽의 시대에 대승불교 운동이 전 인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근본 배경이 된다. 대승불교는 모든 이가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보편성과 상호 존중을 강조했다. 이는 붓다가 남과 여라는 성을 넘어서 깨달음이 존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처럼, 승려와 신도의 경계를 무너트리게 된다. 즉 소승불교에서 깨달음에 차등을 두어 깨달을 수 있는 이와 깨달을 수 없는 이를 구분하고, 승려와 신도를 나누던 것을 넘어 진정한 인간 평등을 구현한 것이다.
--- p.129
어떤 사람이 캄캄한 방에 횃불을 들면 모든 물건이 두루 보이듯, 『대반열반경』의 횃불도 그와 같아 보살이 들면 대승의 깊은 이치를 바로 보게 되느니라. 또 태양이 뜨면 밝은 광명이 모든 산과 골짜기를 비추어 우리가 온갖 물건을 보게 하듯, 『대반열반경』이라는 지혜의 태양도 대승의 깊은 이치를 비추어 소승(성문 · 연각)들로 하여금 붓다의 진리를 보게 하느니라. 이는 『대반열반경』이라는 미묘한 경전을 들은 때문이니라. _ 『대승열반경』 권19, 「22. 광명변조고위덕보살품」
--- p.132
『대반열반경』의 핵심은 모든 중생에겐 불성이 존재한다는 보편론으로서의 불성사상이다. 그런데 이 불성사상이 견성성불의 남종선에 수용된다.
--- p.183
이 경을 듣기만 하면 비록 번뇌가 있더라도 번뇌가 없는 것과 같아, 인간과 신들을 평안하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자기의 몸에 불성이 있는 줄을 분명히 알며, 이것은 항상하기 때문이니라. _ 『대승열반경』 권8, 「14. 조유품」
--- p.191
선남자여! 이 미묘한 『대열반경』이 모든 선한 법의 보배 창고이니라. 마치 큰 바다가 여러 가지 보배를 간직하듯이, 『열반경』도 그와 같아서 온갖 글자와 뜻의 비밀한 봉안처가 되느니라.
선남자여! 수미산이 모든 약의 근원이 되듯이, 이 경전도 그와 같아 보살계의 근본이 되느니라.
선남자여! 허공이 온갖 물건을 용납해서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 경전도 그와 같아 온갖 선한 법이 머무는 곳이 되느니라. _ 『대승열반경』 권3 「24. 가섭보살품」
--- p.198
붓다는 이 세계가 고통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꿈과 같은 거짓이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간에겐 숙명적으로 죽음이 담보되어 있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것이다.
--- p.206
대승불교가 부파(소승)불교와 변별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중생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천명이다. 이는 소승불교에서 붓다가 될 수 있는 사람과 붓다가 될 수 없는 사람이 나뉘는 방식과는 다른 대승불교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 p.214
여래가 오늘 중생들에게 내재한 불변의 본질적인 깨달음의 창고를 드러내나니, 그것은 불성이니라. 이제 모든 중생이 이것을 보고는 기쁜 마음으로 여래에게 귀의하리라. 가리켜 주는 사람이란 곧 여래요, 가난한 여인은 온갖 중생들이며 순금 항아리는 불성이니라. _ 『대승열반경』 권8, 「12. 여래성품」
--- p.225
우리가 미래의 어느 때엔가 붓다가 될 존재라면 지금도 중생일 수는 없다는 판단도 가능하다. 완전한 붓다는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므로, 미래에 완전한 존재는 현재에도 완전하게 존재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불성은 여래장처럼 가능성으로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전함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 p.229
『대승열반경』은 자기 극복을 하면서 마침내 일천제도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천제성불설’을 확립한다. 이는 불교의 본질을 되돌려 붓다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대승열반경』의 실로 위대한 업적이라고 하겠다.
--- p.251
천제성불설로 인해 대승불교의 정체성은 명확해지며, 붓다에 의해 제창된 인간 평등은 비로소 완벽하게 구현된다. 물론 『대승열반경』 이전에도 『법화경』에서 ‘8세의 용녀’나 불교에서 최고의 악인으로 평가되는 ‘제바달다’도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등의 천제성불과 유사한 내용들이 논의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이 천제성불설로 명확하게 못 박힌 것은 『대승열반경』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 p.253
『대승열반경』의 가장 중요한 구절은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다. 이 구절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드러내는 위대한 선언이다.
후일 중국불교의 선종에서는 이 불성이 미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불성현기). 그렇다면 불성을 가진 모든 중생은 일체의 가감 없이 현재 그 자체로 붓다(완전함)인 것이 된다.
--- p.283
『대승열반경』에 담긴 불성사상은, 중생의 본질은 구름에 가린 태양처럼 현실적으로는 문제가 있지만, 태양 자체가 어두워질 수 없듯 항상 밝다는 점을 분명히 해 준다.
--- p.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