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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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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4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216g | 125*205*12mm
ISBN13 9791190533423
ISBN10 119053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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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의 얼어붙은 심장 위,
얼음의 억센 손에 붙들린 갈대 위를 걸었다.

내 몸에 어느새 스며든 초록빛 싱그러움으로
나는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이 아무 소리 없이, 백지 속 거울의 중심까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 p.9

좋아했던 오래된 책들의 페이지를 열 때 당신이 준 철필을 사용했다. 지금 그 철필로 천천히 내 정맥을 연다. 원피스 소매를 걷지는 않았다. 칼날은 먼저 옷감 속으로, 다음에는 피부 속으로, 마지막으로 살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가장 먼 곳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곳으로 그었다. 저항이 점차 줄더니 이내 사라졌다. 블랙베리나 라즈베리의 거품처럼 솟았다가 솜털처럼 미지근하게 흘러내리는 피가 생생히 느껴졌다. 마치 첫 태양에 살짝 베인 꽃이 벌어지듯이.
--- p.10

이곳에는 당신이 준 마지막 선물인 양 이 철필과 그것으로 베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 벌어진 이 상처, 이 공포, 이 고통을 사랑한다. 그것들이 없었더라면 당신을 내 상상이 만들어 낸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 표식들은 당신 것이다. 녹아내린 내 안에서 피 흘리는 당신이란 존재. 서로 얽히고설켜 분리할 수 없는 호흡과 존재. 하나가 시들면 다른 하나도 메말라 가는.
--- p.17

마침내 나는 상처를 주는 건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둘러싼 어두운 밤이며 밤의 외피임을 깨달았다. 다시 사랑이 가능해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달지 않은 달콤함. 폭력적이고 상냥한 부드러움……
--- p.22

기다림, 기다리기. 올 수 없는 것,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나요? 사랑이 저주임을 알고 있나요? 당신에게서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서는 살아 있게 남겨두고, 일상을 벼락에 맞아 불타버린 황폐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요?
--- p.59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그래도 서신 교환은 중단되지 않았다. 답장을 보낼 때면 때때로 내가 선택한 단어들이 어색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당신은 늘 내가 쓰고 싶었던 말을 읽어냈으니까. 단어 밑의 단어들. 흑백의 생채기가 가득한 이 편지들은 우리를 휩쓸었던 광기, 몸짓으로 접힌 주름 속의 광기를 모사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다른 것을 말했다. 편지는 너무나 관대해서 자신을 표현할 방법을 한껏 늘려주었고, 다채로운 어린 시절을 꽃다발로 만들어 주었다. 당신이나 내가 아니라 ‘우리’에게 머물러 기쁨을 주었던 사랑이 이 단어들의 진정한 저자였다.
--- p.60

욕망은 장소나 편지, 심지어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욕망은 어디에나 존재했고, 보기만 하면 되는 가장 단순한 것들 속에 있었다.
--- p.67

이처럼 단순한 신비 속에서, 아주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순간들 속에서 나는 당신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당신이 없다고 해서 당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당신은 내 안에서 돌아다녔고, 내 입술에 부딪혔다.
--- p.63

나는 세상의 지성에 금세 지루해졌다. 언제나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전쟁과 돈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들에서, 무엇보다 성찰은 없이 그런 일을 과장해서 떠드는 잡담에서 도망쳤다. 한 시대의 분위기가 제시하는 점선을 따라 사고를 오려내는 일. 영혼과 혀를 빠르게 고갈시키는 입에서 나오는 소음. 나는 웃거나 침묵했다. 진정한 언어는 사랑이라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p.71

나는 다정함과 잔인함이 욕망의 이면에 서로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존재는 부재로 인해 성장했기에 부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탄생은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때로는 나아가는 일이 포기나 멀어짐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 p.74

나는 단어의 암실에서 당신을 찾으려고 세상에 대해서 눈을 감았다. 빛의 두루마기를 펼쳐 일상의 언어와는 판이한 언어로 기록된 고통을 해독했다. 내가 꼭 끌어안은 기도서들. 책 안의 채색 삽화 하나하나는 현기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져 힘을 잃은 비명이자 부르짖음이었다.
--- p.84

나는 이 상처에 머물고 싶지 않았고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상처가 나를 지치게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상처를 고갈시켜야 했다. 조금도 몸을 사리지 않고 모든 상처를 넘어서야 했다. 선택하거나 분류하는 건 바랄 수도 없거니와 가능하지도 않아서 바람, 비, 불 등 가릴 것 없이 모든 게 통째로 쏟아져 들어오는 절대적인 열림에 도달해야 했다. 내 유일한 힘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것이었다.
--- p.127

죽음과 글쓰기, 읽기와 삶은 서로 닮아 있다. 무언가 죽어버린 곳에서부터 글쓰기가 시작되며,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막 지나간 죽음의 냄새를 맡는 것. 코를 내밀고 냄새를 맡음으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기도 하는 것.
--- p.142 「김연덕 시인 추천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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