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영화 비평 등을 특유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인문학 블로그로는 이례적으로 방문자가 300만 이상을 기록했다. ‘다음 인문학 파워 블로그’로 선정되었으며 ‘영화와 함께 보는 인문학’ 팟캐스트를 통해 인문학으로 영화를 읽으며 우리 사회에 얽혀 있는 불안, 아픔, 무기력 등을 풀어냈다. 현재는 영화 인문학 강의를 하며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며 영화, 문학, 음악, 춤, 철학에 이르는 글을 쓰고 있다.
사실 기억이라는 것은 명증한 사실의 종합이 아니라 스스로도 파악하지 못한 주관적 감정의 덩어리라고 볼 수 있다.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더라도 각 개인이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은 다를 수 있기에, 한 가지 사건 속에도 여러 기억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기억은 견고한 토대 없이 항시 일부를 잃어버리고 다른 것으로 변해버리는 특징을 가진다. 과거에 긍정적이었던 기억이 부정적으로 바뀌기도 하고 부정적이었던 기억이 긍정적으로 바뀌기도 한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에 담긴 감정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순간의 감정은 강한 유대를 가진 무언가를 통해 다시 되살아나기도 한다. 클레멘타인은 어렴풋한 감정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떠올린다. 다만 스스로 삭제해버린 기억이기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뿐, 사랑했던 시간과 흔적은 온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조엘마저 기억이 완전히 삭제된 이후 그들은 우연히 바닷가에서 다시금 만나 사랑에 빠져든다. 비록 사랑했던 이유는 사라졌으며, 아마도 같은 이유로 지겨워지고 싸울 것도 뻔하지만, 그 감정의 흔적은 남아 있기에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억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했던 이유는 생각나지 않더라도 그 순간의 감정이 다시금 나타났을 때 과거는 현재에서 재현된다. 과거의 감정은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더해준다. 이것은 경험해봤기에 가능한, 과거가 나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파이는 이 둘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즉 이성을 중심에 둔 채 신비적 체험과 믿음을 통해서 자신의 살아 있음을 지속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본질만 바라본다면 호랑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질에 앞서는 성현의 체험과 믿음은 리처드 파커를 존재하게 만들었다. 믿음을 통해 존재하게 된 리처드 파커는 생존이라는 본질에 영향을 주게 된다. 결국 믿음이 본질을 바꾸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비적 체험과 믿음이 가져온 마술적 효과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 된다. 호랑이가 정말로 존재했느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파이는 믿었다는 것이고, 그 믿음을 통해 나타난 성현은 파이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전달해 주었다는 것이다. 즉 믿음이 존재의 여부를 결정지은 것이다. 감옥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유를 얻는 것을 넘어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의미한다. 어차피 콘크리트와 쇠창살로 이루어진 감옥은 바뀌지 않는다. 감옥을 지배하는 도덕과 규범의 허구성을 폭로 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은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갈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앤디는 감옥에 입소한 그날부터 고귀한 삶을 위한 탈옥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준비를 하는 것과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결단의 순간에 결단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엄청난 용기인 것이다. 결국 앤디는 그 어떤 쇠창살도 존재하지 않는 바다의 품으로 뛰어들어 무한한 자유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