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도 이렇게 스트레스를 활용해 꽃을 피우는데, 우리는 스트레스가 없기만 바라는 것은 아닐까? 닥쳐오는 스트레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지켜보면서 연습하다 보면 어느덧 깨달음의 꽃
도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사는 것도 스트레스요, 죽는 것도 스트레스다. 생활 자체가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결국 잘 살고 잘 죽으려면 스트레스를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트레스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스트레스는 게스트다. 주인이 아닌 손님이라는 말이다. 손님은 얼른 대접해서 빨리 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방문한 손님을 인사도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면 성이 나서 행패를 부릴 수도 있다. 또한 너무 극진히 대접하면 오랫동안 머무르며 자칫하면 손님이 주인 노릇을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겨나면 먼저 이를 알아차리고 인사를 해야 한다.
---「스트레스 고객님, 오셨군요!」중에서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다. 나의 아바타일 뿐!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나의 마음’이 아닌 ‘아바타의 마음’으로 객관화시켜 바라다보면 조금씩 여유가 생긴다. 상황의 변화에 대하여 곧바로 반응하지 않고 침착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매사를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지혜가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몸도 아바타, 마음도 아바타, 나도 아바타, 너도 아바타, 우린 모두 ‘아바타’라고 관찰하는 것이 생활 속의 수행이다. ‘아바타’가 생로병사를 거듭하더라도 진짜 나는 아무 상관없다. 진짜 나인 관찰자는 불생불멸(不生不滅) · 불구부정(不垢不淨) · 부증불감(不增不減)이기 때문이다. 태어나거나 소멸하지도 않고, 더럽거나 깨끗하지도 않고,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살기가 편해졌어요」중에서
무간지옥이란 아비지옥을 말하며, 쉴 틈 없이 형벌에 시달리는 지옥이다. 아버지를 죽이거나, 어머니를 죽이거나, 아라한을 죽이거나, 부처님 몸에 피를 내거나, 대중의 화합을 깨뜨린 자가
가는 최악의 지옥이다.
이승이 있으면 저승이 있다. 저승의 판관을 지낸 여주 선생의 『저승문답[幽冥問答錄]』에 따르면, 지옥의 처벌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 죄악은 낱낱이 밝혀져 결코 발뺌할 수가 없으며, 각각의 죄업에 따라 남김없이 처형받는다. 살아생전 자신의 선행과 악행이 모두 업경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한 이승에서는 열 번의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단 한 번의 처벌로 끝나지만, 저승에서는 열 번 모두에 걸쳐서 엄정한 처벌을 받는다. 인과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다만 시차(時差)가 있을 뿐!
---「내생을 믿지 않는 자가 짓지 못할 악행은 없다」중에서
‘코이’라는 물고기는 작은 어항에 키우면 5~8cm, 큰 수족관에 키우면 15~25cm, 강물에 자연 방류하면 90~120cm까지 자란다고 한다. 같은 물고기인데도 주변 환경에 따라 피라미가 될 수도 있고, 대어가 될 수도 있다. 이 물고기는 성장억제 호르몬 분비가 가능하기 때문에, 스스로 물의 양과 깊이 등을 측정하고 이에 맞추어 성장하는 것이다.
인간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똑같은 인간이라도 어떤 환경에서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다. 불교로 비유하자면, 작은 어항은 소승이요, 큰 수족관은 대승이며, 강물이나 바다는 정토라 할 수 있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중에서
첫째, 모든 부처님께서 챙겨주신다. 『아미타경』에서는 이 경전을 듣고 받아 지니거나, 제불 명호 들은 이는 일체 모든 부처님이 보호하고 챙겨주어 최상 가는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둘째, 탐 · 진 · 치 삼독이 자연히 소멸한다. 극락정토에 대한 확신이 생기니 자연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줄어든다. 더불어 삶의 애착도 줄어든다. 탐욕이 줄면 화낼 일도 적어지고 어리석은 언행도 사라진다.
셋째, 몸과 마음이 부드럽고 상냥해진다. 삶과 죽음에 유연해지니, 몸과 마음 또한 따라서 부드럽고 상냥해진다. 심지어 죽은 후에도 몸이 부드럽고 굳어지지 않는다.
---「아미타 명상의 일곱 가지 기대 효과」중에서
불교는 자각(自覺) 각타(覺他) 신앙이다.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궁극에서는 자타가 둘이 아니지만 일단은 자력과 타력을 함께 쓰는 것이 현명하다.
자력은 인(因)이요, 타력은 연(緣)이다.
인이 충실해도 연이 부실하면 과가 부실하다.
연이 충실해도 인이 부실하면 과가 부실하다.
인도 충실하고 연도 충실해야 과가 충실하다.
자력은 스스로 수영법을 배운 것과 같다. 잔잔한 호수나 작은 강은 홀로 건널 수 있다. 하지만 풍파가 세차게 몰아닥치는 고해 바다는 절대 건널 수 없다. 남들 또한 건너게 해줄 수도 없다.
아미타 부처님께서 만드시고 관세음 보살님과 대세지 보살님이 이끄시는 견고한 금강반야선에 어서어서 올라타자. 정원은 무한정이다. 나도 타고 너도 타고 우리 모두 탈 수 있다. 타기만 하면 누구나 자동해탈이다.
---「인(因)x연(緣) = 과(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