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에르 마을이 거기 있다는 걸 알지만, 그건 그냥 이름이지 그 이상은 아닌 격이다. 소음이랄 만한 소리도 없다. 주일날 아침 8시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약간 서툴게 울릴 때를 제외하곤 말이다. 그래도 그곳 사람들이 불행한 건 아니다. 세월의 운행에 순응하며 그저 기쁘게 지내는 듯 보인다. 사람들은 한 해가 베푸는 선물을 받고, 겨울에는 난롯가에서, 봄에는 나무 아래에서, 가을에는 포도 덩굴시렁 아래에서 지낸다. 그렇게 살기에 모두, 걸음도 미소 짓는 일도 느긋하다. 질문에 대답하는 일도 느릿느릿하다. 모두 평화로운 신뢰감 때문이다.
--- pp.32-33 「보리솔」 중에서
난 이렇게 되뇌었다. “참 연약한 세계 아닌가. 행복이란 게 고작 물 한 줄기에 매달려 있는 세계니. 아그리콜 생각도 그런 거지.” 그런 연약함이, 덧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행복에서 비로소 번져 나오는 매력을 보리솔에 부여해주었던 것이다. 그런 행복이란 밤낮 천행天幸에 달려 있다고 느껴지기에 우리는 그것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불안정하기에 부서지기 쉬운 그 보화들은 이토록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면모를 보이고, 우리는 그걸 순수히 기적인 양 느끼게 된다.
--- pp.77-72 「보리솔」 중에서
프로방스의 외딴 ‘농가’에서는 언제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법. 그러려면 강단이 있어야 하는 법. 왜냐하면 그 막연한 기다림, 그 이름 모를 욕망은 대부분 충족되지 않기에 더 기다리지 않으려 시골을 등지기도 하고, 오지 않는 그 존재를 찾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시도니는 시골을 떠나버리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깊은 본능이 그녀를 납득시켜준 바대로, 기다림의 천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하늘의 호의를 알 수 있는 것이니, 아직은 실체 모를 이 상상의 얼굴을 불확실한 행로에서 찾으려 들기보다 운명이 점지한 마지막 날까지 그리 기다리기를 원할 것이다.
--- pp.117-118 「시도니」 중에서
설명 불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이들. 그러면서도 또 찾아오곤 하던 아이들. 다음 날이면 으레 다시 찾아오던 그 아이들. 더 두려운 듯하지만 여전히 열정을 느끼며, 아니 더 대담해져서겠지. 발꿈치를 높이 세우고 서서 울타리 너머로 호기심에 차 있는 그 세 아이의 머리통은 어떤 다정함마저 풍기고 있었던 게다.
그러나 그네들의 시도는 누가 알아주지 않았다. 펠리시엔은 접근 불가였다. 아무것도 그들의 용기를 꺾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여자아이는 아이들의 가슴 찡한 집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어찌 그리 무관심 일색인지,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미지의 여자아이가 온 일이 그들 가슴엔 그리 큰 감동이었건만.
--- p.185 「펠리시엔」 중에서
이 외진 곳에서 그나마 유일한 이 조무래기들과도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펠리시엔은 자연스러운 세상과 떨어져 있었다. 아이는 우리에게만 의지했다. 그러니 어린 시절만이 줄 수 있는 호의를 누리지 못했다. 상상력과 감정과 누그러뜨릴 수 없는 사기士氣가 엮어주고 잠시 유지하다가 이윽고 잠깐의 그 구조물을 허물곤 하는, 유년 공동체의 마법 같은 삶을 대신해줄 것은 세상에 없다. 아이는 활발함을 잃은 자신의 상태엔 걸맞지 않은, 발랄한 유희의 왁자함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실제로(몰입하노라면 미친 짓도 불사하게 되는) 유희를 즐기려면 자신을 잊어야 하는데, 기억력을 거의 다 상실한 마당에 어찌 또 자신을 잊을 수 있겠는가? 펠리시엔에겐 추억이 없었다. 추억들로 세워진 상상의 세계 속에서만 자신을 잊을 수 있는 법.
--- p.187 「펠리시엔」 중에서
거의 식물적인, 삶의 순수한 순간들이다. 나뭇잎 두어 잎이 살랑거리며 바람이 지나갈 때 약간 진동하는 어떤 선 가닥으로만 자신과 맺어져 있는 듯한 삶. 생각에서 존재의 무심함으로, 거의 알지 못한 채 건너온 만큼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도 딱히 없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저 시간을 벗어난 행복에 대한 감각일 뿐. 정신보다 더 투명한 육체 안에 있는 웅성거림들, 목소리들, 향기들 그리고 행성의 느릿한 표징들이 경이롭게 가로지르는 그런 육체 안에.
--- pp.209-210 「펠리시엔」 중에서
그녀는 작게, 겸손한 조건에서만 아파하기를 택했다. 그녀는(나는 오래전부터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고통의 덩치란 우정을 깎아내면서 커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끌림이랄까, 적절성의 감정 그리고 효용의 법칙에 따라 고통에 최소한만 양보했다. 슬퍼할 시간이 있는가 하면, 사랑할 시간이 있다(라는 게 필경 그녀의 생각이리라). 그것들을 뒤섞지 않는 것이, 첫번째 것에는 적게, 두번째 것에 더 마음을 쏟는 편이 현명하다는 게 그녀 생각이었다. 그렇게 행동했다. 바로 거기서 그녀의 내적 희망, 비밀스러운 약속에 대한 믿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이런 감각은 노경에 든 그녀의 영혼을 영원히 도래하는 청춘의 방향으로 귀결시켰다.
--- p.233 「뱀과 별」 중에서
투박했지만 강했던 사랑. 나도 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무심한 피조물의 무엇을 사랑할 수 있었던 걸까? 〔……〕 우리는 무無의 매혹에 걸려든 듯했다. 이제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아이가 지금 여기 없다는 것, 바로 그 부재였다. 설명할 길 없지만, 우리는 부재의 부재를 애석해하고 있었다. 마음과 정신과 기억력을 앗긴 이 여자아이가 리귀제의 커다란 농가를 딱히 의도 없이, 그저 오가던 모습을 더 볼 수 없다는 것에 슬퍼진 우리는 마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각자 자신의 생각에 젖어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둘은 그 아이를 찾고 있었던 게다. 차츰 나는 이 침묵의 새로운 면을 관찰하게 되었다. 아주 과묵하다 하더라도 사라진 한 존재는 한 집안의 통상적 소리에 또 다른 공백을 만든다는 것을. 더는 듣지 못하게 된 어떤 발걸음, 어떤 한 숨소리가 회한의 자락과 함께 하나의 부재를 만들었던 게다.
--- p.237 「뱀과 별」 중에서
“제 생각으로는 노인이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는 실망하고 불만스러워 보였다. 웅얼거리듯 덧붙이기를,
“그렇지 않다면 어린 이아생트를 내버렸겠어요? 아아, 그이는 우리에게 익명의 피조물을 내던져놓은 거죠. 제 이름을 불렀는데도 무표정한 아이, 그게 어디 인간이라 할 수 있나요?……”
그는 몽상에 잠겼다. 이윽고 슬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참 고운 이름인데……”
이 이름이 그를 다시 오래도록 꿈에 잠기게 했다. 우리는 그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대단한 노인이죠. 한데 무엇 한 끗이 부족했던 걸까요?”
“아마도 사랑이었을 겁니다.” 신부님이 답했다.
--- p.301 「뱀과 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