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형이상학으로부터 관념, 감정, 정치를 망라하여 ‘상상적 인과성’이라는 제목으로 연구했던 박사 논문 시기 이래 나는 주로 관념과 감정, 정치철학을 연구했다. 그러다 10여 년 만에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전체를 다시 보았다. 해묵은 용어들을 마치 처음 보는 양 다시 따져보았고, 특히 실체 일원론의 의미를 내가 할 수 있는 한 집요하게 분석했다. 그런 다음 나는 이전에 비꼬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멋 부리기 위한 수사 정도로 생각했던 “Hen kai Pan”(하나이자 전체)이라는 레싱의 유언, 그리고 합리론자라면 일원론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 비로소 수긍하게 되었다. 단 무세계론이라는 비난을 받은 이 일원론이 또한 최대한의 다양성을 개방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실체가 하나밖에 없는 곳에서 모든 개별자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 많아진다. 실체 일원론에서 모든 것은 방식의 차이, 관점의 차이, 정도 차이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또 그런 만큼 실체 일원론은 우리에게 섬세한 사고를 요구한다. 모든 것이 ‘~하는 한에서의 신’(Deus quatenus)인 이 합리주의 체계에서 그 합리성의 질은 ‘신’보다 ‘~하는 한에서’를 얼마나 잘 분절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다룬 형이상학은 『윤리학』의 총 5부 가운데 1부와 2부의 전반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작업을 통해 나는 스피노자 철학의 꽃은 결국 형이상학이라는 것 역시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서문」중에서
정신의 역량은 그 대상인 신체의 역량에 비례하며, 그런 명목으로 스피노자는 ‘자연학 소론’에서 신체의 역량을 고찰한다. 이 역량은 그것을 둘러싼 다른 물체들과의 관계에 달려 있는데, 스피노자는 이 관계 역시 지금까지 실체의 양태라 부른 것과 등가어로 사용된 변용이라는 용어로 기술한다. 그러니까 신체의 역량은 그것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어떻게 변용되고 그것들을 어떻게 변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인과성은 신체 변용의 메커니즘을 통해 인식될 수 있고, 이 메커니즘은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 전체에 걸쳐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변용은 첫째, 실체와 양태를 핵심 개념으로 하는 스피노자 형이상학의 연장선상에 있고(변용은 양태와 등가어이다.), 둘째, 스피노자의 자연학을 알려 주는 거의 유일한 통로이며(물체들 간 상호 작용은 변용의 메커니즘으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데카르트나 칸트의 자유의지만큼이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더 윤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더 역량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고 역량은 변용 능력으로 가늠된다.)
--- p.292
신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정신을 데카르트는 다소 전략적으로 전통 스콜라의 용어를 따라 ‘실체적 형상’이라 부르지만, 이산적 단위로서의 이 신체는 근대의 학문적, 정치적, 사회적 장을 구성하는 본질적 단위가 된다. 피부로 둘러싸여 있고, 생체 역학의 단위가 되며, 권리를 배태하고, 불가침의 자유나 책임의 최소 단위이며, 인구 통계의 단위가 되고, 생활 세계의 지평을 구성하는 등등의 고유한 신체 말이다. 앞서 보았듯 데카르트는 심신 합일을 합리성의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지만,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근대적 사유 및 제도의 초석이 된다.
반대로 스피노자에서는 인간 신체 역시 다른 물체들이나 타인과의 관계, 제도, 관행 등에 정체성 자체가 연동되어 있고 나아가 우주 전체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 같은 신경 생리학자를 논외로 한다면 들뢰즈, 네그리, 발리바르 같은 현대 형이상학자와 정치 철학자에게 스피노자가 오늘날 환영받는 핵심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신체 때문이다. 스피노자를 참조하지는 않지만, 푸코의 광기론은 물론 라캉의 상상계 이론의 출발점도 바로 ‘내 신체’ 관념의 타자 의존성이다. 이에 대비해서 내가 특별히 보여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학적 물체들에 대한 인식에서 인간 신체에 대한 느낌까지 관통하는 스피노자의 합리주의이다.
--- p.381~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