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듬해 5월은 내 평생 처음으로 칼새가 눈에 들어오지 않은 5월이었다. 새들이 한바탕 즐거워하는 동안 나는 창문을 외면하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칼새를 다시는 못 보더라도 상관없다고 느꼈다. 인생이 기묘하고도 희한하게 꼬이면서, 나는 다른 피조물과 어울리지 못하고 공허한 대기 속을 떠도는 불가해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인류 전체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p.18
“귀 기울여, 고개 들어 봐!” 봄마다 신비롭게 돌아오고 새벽이면 어디선가 다시 나타나는 칼새와 같은 새들이 부활 신화의 탄생에 한몫한 걸까? 그들은 여전히 인간의 시각과 이성 한구석에 내재된 무언가를 보여주는 걸까? 현대 과학과 휴머니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문화 전반에는 풍경과 자연, 계절, 쇠락과 재생에 대한 신화와 상징이 스며들어 있다. 야생과 길들여짐 사이의 경계, 이주와 환생, 보이지 않는 괴물과 잃어버린 대륙에 관한 전설이.
--- p.39
인간은 이야기꾼이자 몽상가로 진화해왔다. 그것이 바로 세상 속 인간의 자리이며, 우리는 그 자리를 저버릴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추방의 원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갈 방법으로 볼 수는 없을까? 물론 언어와 상상력은 외부 세계와의 신속하고 감각적인 관계를 다소 약화시켰고 우리가 나머지 생물종과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다른 생물들에게 느끼는 친근감을 이해하고, 우리의 특이성을 만물의 질서에 맞추고, 각성하여 자연을 찬미하고, 자연계의 노래에 우리의 특별한 ‘노래’를 더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 pp.64~65
글을 쓰면 쓸수록 내 삶이 지금껏 연기해온 외톨이 방관자의 삶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많은 곳에 가보았고 여러 친구를 사귀었으며, 돌이켜보면 나름대로의 업적도 남긴 사람이었다. 다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내 정체성을 되찾았다는 안도감일 뿐만 아니라 수년 동안 잠들어 있던 나의 일부를 열어주는 열쇠였다. (…) 상상력을 통한 정신세계와의 관계 회복이야말로 내게는 진정한 ‘자연 치유’였다.
--- p.100
어떤 장소를 서식지, 은둔처, 삶의 터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 문화 보호구역’이란 우리에게 낯선 개념이다. 우리는 자연과 문화를 반대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서식지란 단순히 살기 좋은 (그리고 인류의 기원과 통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정착하게 된 장소이기도 하다.
--- p.113
들판을 가로지르는 원숭이올빼미들의 의식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도 암암리에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좋은 땅’, 빛과 어둠의 경계, 사물의 올바른 질서에 대한 성찬이자 축성이다. 여름 철새가 재생을 상징하듯이 원숭이올빼미는 지속성을 상징하며,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 p.195
가장 매력적인 식물은 난초였다. 많은 난초가 정교하게 빚은 도자기나 부화 중인 곤충 군집처럼 보였다. 난초에 학명을 붙인 식물학자들도 그 생김새에서 도마뱀, 벌, 벌레, 나비, 거미, 피라미드까지 별의별 것들을 연상한 듯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난초과(Orchis)의 경우 꽃송이 하나하나를 머리 또는 투구와 팔다리로 이루어진 인간의 축소판으로 보곤 했다. 머리 크기, 낭창낭창한 팔다리, 잘록한 허리, 우아하게 펼쳐진 돌출부에 따라 난초 꽃은 여성이나 남성 혹은 군인이 될 수 있었고, 팔다리가 유난히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이면 원숭이가 되기도 했다.
--- pp.206~207
‘우드시어’는 ‘나무 예언자(wood-prophet)’를 뜻한다. 클레어는 곤충 자체의 습성뿐만 아니라 양치기를 비롯해 날씨에 민감한 생물로 이루어진 더욱 큰 공동체의 맥락에서 이 곤충의 명칭을 선택한 것이다. 학명이 친족성을 바탕으로 종을 분류하는 것을 목표로 하듯, 속명 역시 더욱 광범위한 분류 체계를 통해 종간의 유사성과 연관성을 보여주려고 한다.
--- p.212
부분의 명칭과 단순한 인과관계 이론에 국한된 자연과학은 기억, 느낌, 자발성, 존재의 총체성에 대한 점점 커져가는 필연적 감각이 뒤얽힌 세계를 설명하는 데 부적절하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농장에서 관찰한 흰턱제비는 본능적인 행동 패턴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 p.239
공감 주술은 진정한 과학으로 나아가기 이전의 원시적 단계가 아니라 또 하나의 이해 방식이다. 공감 주술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길 원한다. 공감 주술은 관찰과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것들을 더 작고 조심스러운 부분이나 ‘원자’로 축소하여 설명하는 대신 그것들이 세상의 얼개에 맞아떨어질 때까지 더 넓게 바라보려고 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구체적인 것들의 과학’이라고 불렀다.
--- pp.242~243
올여름에 습지대를 걸으면서 나 자신도 흐르는 물에 잠겨 물의 형상을 띠게 되었음을 가슴 찡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일시적이나마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이다. 나는 내 신발에 들러붙은 씨앗을 운반한다. 내가 물웅덩이 건너편을 넘겨다볼 때마다 잠시나마 갈대 사이로 햇살이 비쳐든다. 이렇게 뜨거운 계절에도 이탄 흙을 밟을 때마다 발 주위로 솟아나는 미세한 물방울을 보면 내가 몇 미터, 나아가 몇 킬로미터에 걸쳐 잠든 수생식물들에게 물을 뿌려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 p.254
거대한 집회, 한참 이어지는 과시적인 축하 비행, 여러 종의 뒤섞임은 모두 기존 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붉은솔개가 그러듯 다른 새들도 어둠에 맞서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밤중에 모여 쇼를 벌이는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너무 인간 중심적인 생각일까? 서로 알지 못하고 아마 알 수도 없겠지만 나란히 집으로 향하는, 같은 길을 가는 서로 다른 여행자들이 함께하는 익숙한 순간.
--- p.299
소로의 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야생 그대로 두는 것이 세상을 지키는 길이다”라는 문장도 이런 의미였을까? 세상의 안정과 새로운 시작이,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고대의 숲과 은빛 파도 모두가 통제받지 않은 자연의 에너지에서 나온다는 뜻일까?
--- p.300
나는 ‘식물성’이라는 개념에 묘한 매혹을 느낀다. 자의식이라는 특권 없이 지구에 살아가는 다른 형태의 정신들과 조화롭게 지내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들도 공유지의 일원이 아닌가. (…) ‘식물적 관계’에 관해 배우고 인간과 식물이 오래전부터 공유해온 감각을 우리의 행동과 원만하게 결합시키려는 시도가 아드레날린 과잉인 우리 문화에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를 동시에 살아갈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
--- p.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