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문학에 대한 내 입장 또한 세부적으로는 여러 차례 변모를 겪었다. 그러나 여섯번째 비평집 목차를 앞에 놓고 지난 7년 동안 써 모은 글들을 일별해 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아직 ‘켄타우로스적인 비평가’가 맞는 듯하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내가 ‘시절’이 글쓰기의 ‘형식’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혹은 잘 고안된 형식이 어떻게 해당 시절에 성대를 빌려주는지에 관심이 많았단 사실이 희미하게나마 확인되어서다.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절’이 바로 ‘지금’이 아니라 자꾸 ‘지난 시절’을 향하고 있어서다. 내가 이른바 ‘현장 비평가’가 맞나 싶다.
--- 「책머리에」중에서
달변은 항상 ‘그들’의 체계이자 함정이다. 숙고되지 않은 통념과 의견만이 달변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카이브로부터 고작 말을 실어 나르는 일이 달변이다. 눌변은 그와 달라서 ‘그들’의 말이 아닌 말, 따라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말을 찾아 나선다. 그러므로 그 말은 처음으로 하는 듯한 말이며, 기필코 더듬는다. 더듬더듬 없는 말을 찾아서 그토록 어렵게 뱉는 말. 아마도 ‘나-그’처럼 상징 질서의 위기에 봉착한 자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상징적 질서와 실재의 경계에서 말하는 자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 결별하고 ‘우리’와도 결별한 ‘나-그’ 같은 ‘비주체’들 말이다.
--- 「눌변의 문학 -이인성, 『낯선 시간 속으로』」중에서
혹독했던 상처에 과거형은 없다. 이는 마치 프로이트가 외상적 사건의 위력을 ‘반복’으로 설명할 때와 같은 이치여서, 5·18을 겪은 우리는 이한열의 죽음을 1980년 광주와 겹쳐서 다시 경험했고,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과 촛불시위를 1987년 6월의 광장 위에 서서 다시 경험했다. 그렇듯 참사와 폭력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거대한 애도의 연속으로 이해하게 한다(우리가 아무런 애도도 필요 없는 시절을 산 적이 있던가).
--- 「기억을 복원한다는 것- 김숨, 『L의 운동화』와 『한 명』」중에서
고아, 양아치, 직업이 없는 사람들, 심지어 마르크스마저 보류하거나 미분류 상태로 내버려두었던 바로 그들이 공동체의 최전선에 있었다. 공동체는 ‘몫이 없는 자들’, 심지어 단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사회 속에 그들의 위치가 없었고, 치안 속에 그들의 장소가 없었으며, 언어의 가청권 내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므로) 비존재들에게 몫을 주었다. 그리고 비존재가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한 이상, 그 존재가 다시 비존재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 「공동체와 죽은 타인의 얼굴 - 『봄날』을 다시 읽으며」중에서
요컨대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묻는 자는 신을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일단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음이 생길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데올로기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맹목적인 믿음을 통해서만 그 진리성을 보장받는다. 진리임을 검증했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진리가 상정되는 형국이다. 즉 소외만 있고 분리는 없는 주체, 그런 주체가 바로 이데올로기적 (비)주체이다. 반면 분리의 주체는 질문을 던진다. 라캉에 따를 때, 그 질문의 형식은 이렇다. Che Vuoi(케보이?)
--- 「정작 중요한 것 - 전두환의 죽음에 부쳐」중에서
매클루언이나 키틀러 이후, 매체 기술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각이나 인식 방식을 바꿔놓는다는 말에 우리는 이제 익숙하다. 말하자면 매체는 ‘토대’인데, SNS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장욱의 저 소설들을 읽자니 꽤 오래전부터 우리는 마치 브리콜라주 하듯이, 혹은 스토커처럼, 한정된 정보를 이리저리 조합한 후 그것을 프레임 삼아 세계를 주관적으로 입체화하는 데 익숙해진 히키코모리들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 「소설과 SNS - 백민석의 『버스킹!』과 이장욱의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중에서
우리는 모두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가 되어야 한다. 고유명사의 윤리에 따를 때 그것은 정언명령이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일까? 정언명령들은 대체로 화끈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상적으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함’이란 공통점을 갖는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 실린 이기호의 소설들이 슬슬 불편하게 읽히는 지점이 여기다. 독자를 전혀 불편하게 하지 않는 소설은 훌륭한 소설이 아니라는 신념이 내게는 있으니, 이번 소설집을 통틀어 나를 가장 불편하게 했던 문장들을 군데군데 생략한 채로나마 여기 길게 옮겨본다.
--- 「다시, ‘환대’에 대하여 - 이기호,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중에서
그러고 보니 중요한 사실 하나를 빠뜨릴 뻔했다. 여기서 다룬 세 권의 소설집은 모두 세 작가의 첫 작품집이고, 그들은 공히 젊다. 그러니까 최신의 문화 자본을 상속받은 작가군에 속한다. 문화적 세대란 종종 이런 우연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도 있을 텐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마치 21세기의 벤야민들 같다. 영화와 사진이라는 초미의 강력한 매체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오래 묵은 예술 작품에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그 시간의 압도적인 물질성, 그러니까 ‘아우라’를 포기할 수 없었던 19세기의 마지막 인간 벤야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세 작가를 묶어 ‘21세기 벤야민 세대’라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지 싶다.
--- 「젊은 아톨레타리아트의 초상 - 서이제, 『0%를 향하여』, 이민진, 『장식과 무게』, 신종원, 『전자 시대의 아리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