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적인 고린도 교회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낸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육신적인 교회”였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구원은 받았지만 성장하지 못해서 “영적인 갓난아기” 상태로 남아 있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전 3:1). 이런 사람은 항상 육신을 따르고 육신의 일들을 생각한다(롬 8:5). “젖에 해당하는 말씀들”만 먹을 수 있고(히 5:12), 질긴 고기 같은 “단단한 음식” 수준의 말씀들은 전혀 먹지 못한다(고전 3:2). 그런 질긴 고기에 해당하는 말씀들을 소화하지 못하기에 진리를 깨닫는 데는 “어린아이” 같고(고전 14:20), “의의 말씀들”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며(히 5:13), 또한 그 말씀들을 사용해서 영적 감각들을 단련하지도, 선악을 분별하지도 못한다(히 5:14). 그러다 보니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시기, 다툼, 분열, 교만, 자기 자랑 등의 특징들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전 3:3,4). 고린도전서 8장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는 “우상 숭배”나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문제”로도 상당히 골머리를 썩이는 교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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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의 절제와 보상
1. 사도 바울이 추구한 보상
『그렇다면 내 상이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인한 내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로다』(18절).
15절과 16절에는 두 종류의 자랑이 나온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생기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자랑(15절)과 자신이 복음을 전파한다는 점에 대한 자랑(16절)이 그것이다. 바울은 전자는 고수해도, 후자는 지양했다. 복음 전파는 바울이 자신이 부득불 해야 할 일이며, 오히려 하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화가 닥칠 일이었다. 바울은 실로 사슬에 매인 복음의 대사였던 것이다(엡 6:20).
17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기꺼이 전할 때 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못하여”(벧전 5:2) 억지로 전할 때는 상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 점은 “마지못하여 억지로” 하는 섬김에 두루 적용된다. 비록 기꺼이 하지 않는다 해도 바울이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했던 이유는 복음의 경륜이 자신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바울의 상은 복음을 기꺼이 전하되 대가 없이 전하는 데서 오는 것이며, 복음을 전하고도 복음으로 인한 자신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18절). 이것은 지상에서 받지 못한 보상은 영원에서 받게 된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cf. 눅 14:13,14). 바울은 기꺼이, “기쁨으로” 자신의 사역을 완수했다(행 20:24).
고린도전서 9장에 언급되는 바울의 절제는 “사역자로서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절제”(1-18절)와 “구령을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내려놓는 절제”(19-23절)와 “육신의 욕구에 대한 절제”(24-27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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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신을 세우는 “방언” vs. 교회를 세우는 “예언”
본문 2절에서『알지 못하는 방언』(unknown tongue)으로 말하는 사람은 고린도전서 12:3에서 말씀하시는『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과 분명히 구분된다. 누군가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회중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16절), 일종의『신비들』(mysteries, cf. 고전 4:1)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기 마련이다. 특히 은사주의자들은 흔히 자신들이 방언을 말할 때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서 몸이 뜨거워지다가 갑자기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그것이 터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영”조차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다른 한편에서 방언이 터지도록 끊임없는 연습과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이처럼 “알지 못하는 방언”은 말하는 당사자를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또한 말하는 본인만 알기 때문에 자신에게만 유익이 될 뿐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자신을 세우는 데만 도움이 될 뿐이다(4절). 따라서 이것은 바울이 앞서 말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고전 13:5)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본문 1절에서 사랑을 추구하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하되 특별히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의 은사”는 사람들을 세워 주고, 권면하고, 위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교회를 세우기 때문이다(3절).
성경 변개자들은 고린도전서 14:2의『신비들』(mysteries)을 “비밀(secret)”로 바꾸어 놓았는데, 이것은 “알려서는 안 될” 비밀과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조차 구분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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