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오사카시에서는 히라노구 등 몇몇 구(?)에서 지역 탐구라는 목적으로 〈구 검정 시험〉을 실시하고 있다. 안도의 집은 3채짜리 나가야의 가운데 집이었으므로 그 부분만 공사를 했다. 도편수가 지시하여 목수가 지붕을 잘라 내자 〈드넓은 창공에서 한 줄기 빛이 비쳐 들었다〉. 음침하고 압박감이 느껴지는 나가야의 공간이 쏟아지는 빛의 소용돌이로 가득 찼다. 이 예기치 못한, 그리고 어딘가 성스러운 의식적 체험이 소년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아직 건축가라는 직업을 몰랐던 다다오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중학교를 마치면 수가 될 거야.〉
--- pp.17~18
오사카 사람은 인생을 열심히 사는 데 읽기와 쓰기, 그리고 셈을 필수적으로 꼽는데, 외할머니로부터 철저히 가르침을 받은 정신이 바로 그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부동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돈 계산을 어떻게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마을을 재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는 〈셈을 못 하는 사람이 건축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고 한다.
--- p.38
주택은 과밀한 도시 환경 속에서 엄격한 건축 법규와 한정된 예산을 지키면서 짓게 된다. 한편으로 땅바닥에 발붙이고 사는 서민의 의향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대한 오피스 빌딩이나 집합 주택이 도시 공간을 재구성해 버리는 현실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건축가는 거주하는 사람들과 함께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야 한다. 주거야말로 거점이며 전투의 요새이다.
--- p.48
안도 다다오의 삶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기본 원리는 〈싸우는〉 것이다. 프로 복서로서의 경험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그가 마음을 의지하는 서민의 삶이나 주변의 떠들썩함과는 다른 차원에서 등장하는 거대한 움직임과 대결하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 p.57
안도의 원동력은 피부로 압박감을 느끼면서 격렬하게 호흡한다는 신체적 충동이며, 안도의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건축의 원형은 오사카의 일상성을 드러내는 비좁고 검소한 목조 주거였다.
--- p.70
건설 현장은 지형, 접근 조건, 기후 등에 더해 장인의 솜씨나 기질, 청소 상태 등 인적 요소에 좌우된다. 거기에 더해 철근을 짜 맞추어 거푸집 공사를 하므로 반드시 도면에 그려진 대로 깔끔하게 완성된다고는 할 수 없다. 현장에 따라 정밀도가 좌우되는 것이다.
--- pp.90~91
나가야를 모델로 한 가늘고 긴 상자는 안도의 가장 기본적인 모델이다. 이것을 틀로 삼아 주택을 구상하던 그가 지오메트리를 크게 변화시킨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 10년 정도이다. 이 무렵부터 가늘고 긴 상자 프레임이 등장하고 정육면체에 의한 공간이 정립된다.
--- p.132
한 가지 모티브가 떠오르면 다듬고 또 다듬으면서 만족할 때까지 발전시키는 태도는 모든 건축가에게 공통된다. 하지만 안도의 경우는 스케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집착이 강하다. 원통형이라는 근원적인 형태에 확신을 품은 것은 1985년 전후인데, 거기서부터 진가를 발휘한다.
--- p.139
중요한 것은 안도는 르코르뷔지에의 재림이 아니라 중세 석공이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 같은 임팩트를 준다는 것이다. 그는 마에카와 구니오처럼 건축 스타일에서 복장과 행동거지까지 르코르뷔지에를 추구해 온 사람과는 달리 원래 금욕적이라 글자 그대로 시토회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해왔다. 샤슬랭이 안도를 〈건축승〉이라고까지 잘라 말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 p.180
안도 다다오라는 사람은 일본적인 건축학 단계를 밟지 않고 등장했습니다. 그 점이 좋아요. 그가 〈건축가냐, 예술가냐〉 묻는다면 예술가입니다. 모든 의미에서 표현력이 풍부한 예술가죠. 문장이 좋고, 이야기가 재미있고, 풍모도 좋지요.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사상의 표현자〉이지요.
--- p.247
후쿠타케에게 이끌려 1988년에 처음으로 나오시마를 방문했을 때 그곳은 아직 민둥산이었다. 그렇게 황폐한 섬을 앞에 두고 후쿠타케는 〈여기를 세계 최고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을 펼치는 장으로 삼아 방문객이 감성을 갈고 닦을 수 있는 문화의 섬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 p.269
안도의 시점은 명쾌하며, 그의 발언 역시 오해의 여지없이 명료하다. 그의 건축은 그런 명쾌한 시점에서 생겨난 힘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작품을 받아들이고 지지하는 것은 건축 속에 명확한 세계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 p.344
이렇게 한정된 인원으로 이 정도로 밀도 높은 일을 해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것을 알기 위한 몇 가지 열쇠가 있다. 기본은 안도 사무소와 클라이언트, 시공업자가 충분한 신뢰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 세 점이 원활하게 연결되어 서로 존중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하면 쓸모없는 작업을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이 안도의 철학이다.
--- p.364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는 준공 후에도 계속된다. 「안도 사무소는 목수 같은 존재이므로, 만들고는 나 몰라라 하지 말고 사후 관리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가 말하듯이 사후 관리도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주택은 10년 후, 20년 후에 증개축을 의뢰받는 일도 많으며 클라이언트의 가족과는 세대를 뛰어넘는 교류를 하게 된다.
--- p.365
「건축계에서 보면 나는 골치 아픈 존재입니다. 학력도 다르고, 사회적 기반도 다르고, 일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왜 저 녀석이 인정받느냐는 식의 불쾌한 감정이 많이 쌓여 있는 것 같더군요.」
--- p.376
당연한 일이지만, 안도 다다오는 자신을 세상에 내놓은 오사카를 한없이 사랑하며 오사카 사람이라는 자부심도 높다. 도전적이고 포용력이 있는 동네이며, 지금도 〈나 홀로 건축을 공부했을 뿐인 젊은이에게 한번 해보라고 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것이 자신에게 커다란 기회를 주었던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오사카는 상인 마을로서 전통과 기개를 갖고 있으며, 국가 기관이 여러모로 강력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에 얽매여 있는 도쿄와 달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깝다. 그런 인간미가 오사카의 장점이자 매력이다. 그래서, 안도는 도쿄로 옮기라는 권유를 여러 번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오사카를 쭉 업무의 거점으로 삼아 왔다.
--- p.465
안도 다다오는 미술관과 극장 설계를 통해 한국의 문화 상황 한가운데로 들어감으로써 다른 의미에서 한일 교류의 최전선을 달리게 되었다. 오사카는 한국과 거리도 가까워 한국의 클라이언트들이 적극적으로 안도를 찾아오며, 나오시마 등지에서 안도의 작품을 둘러보면서 거기서 동아시아 특유의 자연 철학과 공간의 존재 방식을 느끼고 현대 문화의 새로운 차원을 안도와 함께 열어젖히려 한다.
--- p.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