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에서 승관제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 신라로부터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 「자장정률(慈藏定律)」 조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불교가 동쪽으로 점점 퍼진 것이 비록 오래되었으나 그 주지(住持)를 받드는(修奉) 것에 규범이 없다. 무릇 통제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하였다 …(중략)… 신라 진흥왕(眞興王) 11년 경오(庚午, 550)에 안장법사(安藏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았는데 1인을 두었고, 또한 소서성(小書省) 2인을 두었다. 다음 해 신미(辛未, 551)에 고구려 혜량법사(惠亮法師)를 국통(國統)으로 삼았는데 또한 사주(寺主)라고도 하였고, 보량법사(寶良法師)를 대도유나(大都維那)로 삼아 1인을 두었고 주통(州統) 9인, 군통(郡統) 18인 등을 두었다.”
--- p.28
고려시대의 경우 승관제를 관할하는 관청으로서 승록사의 양가(兩街) 체제를 알려주는 예로는 1022년(太平 2) 기록된 「고려국영축산 대자은현화사비(高麗國靈鷲山大慈恩玄化寺碑)」 음기(陰記)를 들 수 있다. 이 음기에는 현화사(玄化寺)에 반야경보(般若經寶)를 설치하고 경전을 간행할 때 공이 많았던 사람을 시상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관사(官使) 좌가도승록(左街都僧錄), 부사(副使) 좌가부승록(左街副僧錄)과 우가부승록(右街副僧錄), 판관(判官) 우가승정(右街僧正), 승기사(僧記事), 속기사(俗記事) 등이 명기되어 있는 것이다.
--- p.34
966년에 건립된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靜眞大師圓悟塔碑)〉에는 ‘좌승유(左僧維)인 대덕(大德), 우승유(右僧維)인 대덕’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신라 진흥왕 11년(550)에 정립된 승관제 중 대도유나(大都維那)와 관련된 것으로, 이를 하위법계인 대덕이라 칭하고 있음을 볼 때, 승유(僧維)란 직책은 판관인 승정(僧正) 밑에 속한 승직(僧職)이었으리라 추정된다.
--- p.35
고려시대의 승관제 및 승록사의 구성은 조선 초기에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태조는 고려불교의 제도에 따라 왕사와 국사를 책봉하였다. 태조 즉위 원년(1392) 9월 18일 고려 공양왕의 국사 환암혼수(幻菴混修, 1320~1392)가 입적하자 ‘(태조) 임금이 듣고서 애도하였고 시호를 보각(普覺), 탑호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하였다’ 하며, 태종 원년(1392) 10월에는 조계종의 무학자초(無學自超)를 왕사로 삼고, 즉위 3년(1394) 9월에는 선교총섭(禪敎摠攝)이던 천태종의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았다.
--- p.37
승과(僧科)란 승려 가운데 승직자(僧職者)를 뽑기 위한 과거시험으로, 조선 초에는 선시(選試) · 시선(試選) · 승선(僧選)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선시(選試)가 26회, 시선(試選)이 17회, 승선이(僧選) 7회 언급되어, 조선 초기의 경우 승려의 과거 즉 승과를 칭함에 선시란 용어가 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선시 폐지 후 부활된 명종 대에는 승과(僧科)란 용어가 2회 사용되었으며, 이후 173회에 걸쳐 선과(禪科)란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명칭이 있음에도 승려 과거의 형식에는 큰 차이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 p.66
청허휴정의 유품 중 “중덕대선(中德大禪)의 홍패(紅牌) 1장(張)”이란 내용은 중덕(中德)을 ‘중덕대선(中德大禪)’이라 칭했던 예와 함께, 선시를 통해 홍패교지를 받았음을 알려주는 예가 된다.
--- p.95
선시는 유가의 과거와 흡사한 형태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태종실록』 15년(1415) 11월 기사에는 형조(刑曹)에서 각 품(品)의 노비(奴婢)의 수를 다시 정하여 아뢰었는데, “승인(僧人)은 각종(各宗) 판사(判事) 이하 선사(禪師) 이상은 전에 정한 수에 의하여 15구(口)이고, 중덕(中德) 이하 대선(大禪) 이상은 전에 정한 수에 의하여 10구(口)이고, 무직(無職) 승인(僧人)은 전에 정한 수에 의하여 5구(口)이고…”라 하여, 노비를 소유할 수 있는 수를 기록해 두기도 하였다. 이에 의하면 ‘중덕 이하 대선 이상은 (노비) 10구를 거느릴 수 있는’ 신분이기도 하였다.
--- p.99
양종(兩宗) 설립은 양종에 판사를 두어 승단을 장악, 안정케 하고자 했던 금승(禁僧) 대책 중 하나였으며, 시험을 통해 승직자를 선출하는 선시(選試) 역시 승단 통제를 위한 금승 대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또한 ‘시재행(試才行)’과 정전 납부를 통한 도첩 발급은 승(僧)의 증가로 인한 군액(軍額)의 감소를 막기 위해 시행된 것으로, 모두 금승 조치의 예로 이해될 수 있다.
--- p.100
세조의 호불 성향으로부터 시행된, 선시(選試)와 정전(丁錢) 납부 여부를 떠나, 부역승에 대한 도첩 발급과 승인호패의 발급을 통한 승(僧)의 증대는 세조 사후(死後), 예종(睿宗)으로부터 성종과 연산군, 중종 대에 이르러 선시 폐지 및 도첩제 정지, 양종 혁파의 빌미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p.106
『예종실록』 예종 즉위년(1468) 9월의 다음 기사는 세종과 세조 대에 활약한 신미(信眉), 수미(壽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의 영향이 왕실에 널리 미쳤음을 짐작케 한다.
--- p.108
세조 4년 이래 1471년까지 14년간 『대전』 ‘도승’ 조의 규범에 따라 시경(試經)과 정전 납부 후 도첩을 받은 자가 12인밖에 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으로, 『대전』의 ‘도승’ 조 규범이 무력화된 상황을 전하고 있다. 한편, 부역을 통해 몇만 명이 도첩을 받았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런 세태에 따라 불교 정책에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 p.113
부역 내지 선시(選試)에 따른 도첩 발급에 대한 상소뿐만이 아닌, 『대전』의 예에 따라 3년마다 선시(選試)로 승려를 선발하는 것과 승려를 계문(啓聞)한 뒤에 수금(囚禁)함, 그리고 사찰을 수색하는 데 계문하는 법 등 불교 우대 조항을 폐지하자는 상소 역시 성종 15년 이래 성종 22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