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고학령층 사이에서는 ‘인정 투쟁’의 주요 도구가 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를 풍미하던 모더니즘의 바람을 타고 영어가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른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은 영어나, 일본어를 대화에 곧잘 섞어 사용하면서 시대의 소비와 유행을 이끌었다. 「사교권 장악 수단으로서의 영어」(본문 52쪽)
미군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해방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생존 무기는 단연코 영어였다. 영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제시대 때 해외 유학을 했거나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에는 친일파, 해방 후에는 친미파 노선을 걸었다. 정당으로 보자면 바로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그런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한민당은 사실상 해방 정국을 지배한 이른바 ‘통역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이었다. 「‘통역정치’의 전성시대」(본문 61~62쪽)
1970년대 내내 수출이 국가 제1의 목표가 되면서 각 회사마다 자체 영어 교육을 실시하는 건 물론 사설 영어 학원들이 학생과 직장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런 영어 붐을 타고 문교부는 1971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조기 영어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공청회까지 열었지만 반대가 워낙 심해 철회하고 말았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영어가 생존의 무기였지만, 집단적 차원의 대중 정서는 조기 영어 교육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민심을 의식한 걸까? 박정희 정권은 영어를 최대의 무기로 삼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펴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때때로 강력한 ‘문화적 민족주의’를 내세우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했으며, 1975년에 건립한 민족문화의전당을 세종문화회관으로 명명했고, 어린이회관 앞에 세종대왕의 동상을 세웠다. 동시에 한글 전용 정책을 추진했다. 「수출 전쟁 체제하에서의 영어」「박정희의 ‘문화적 민족주의’」(본문 86~87쪽)
1981년 9월 ‘88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되었으며, 그해 11월에는 86아시안게임의 서울 유치도 확정되었다. 이제 ‘생활 영어’는 시대적 대세가 되었으며, 이런 분위기를 업고 정부는 1981년 10월 영어 조기 교육 방침을 확정했다. 정부는 “10세면 혀가 굳는다”거나 “외국어 교육 환갑은 13세”라는 이론을 내세워 초등학교 4학년부터 특활 시간을 이용해 영어 교육을 1982년부터 실시하기로 했다. 조기 영어 교육은 이미 서울 시내 300여 개 초등학교 중 39개 사립학교와 일부 유치원에서도 실시하고 있었지만, 과밀학급과 교사난 등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빈부 격차에 따른 ‘영어 격차’ 논란이 벌어졌다. 1982년 일반인들의 영어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토익TOEIC이 한국에 상륙했다. 이미 대기업의 80퍼센트가 1년에 한 번씩 자체 영어 시험을 실시하고 있었다. 현대그룹은 사원들을 3등급으로 나눠 보너스를 차등 지급하는 등의 방법을 쓰고 있었다. 토익은 이런 시장을 겨냥해 파고 든 것이다. 「“빠를수록 좋다” VS “주체적 인간”」(본문 91~92쪽)
1996년 영어 과외를 받고 있는 초등학생은 53만여 명에 달했으며 이에 드는 과외비는 연간 3,550억 원인 것으로 추산되었다. 어린이 영어 전문 체인점은 500여 개에 이르며 일반 영어 학원에서 ‘유치원반’을 개설한 학원까지 합하면 1,000여 개 이상이었다. 조기 영어 교육에 투자되는 돈은 교재 시장까지 합하면 6,000억 원대에 이르렀다. 영어 교육열은 상식을 초월했다. 2세 갓 넘은 어린 아이들에게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하는 학원까지 생겨났는가 하면 이젠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린이들까지 해외 어학연수 길에 올랐다. 김포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집계에 따르면 만 6~10세 어린이(유치원생~초등학교 4학년) 출국자는 1993년 3만 5,000여 명, 1994년 4만 7,000여 명에 이어 1995년에는 6만여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들 중 대부분이 방학 기간을 이용, 영어 학원과 여행사가 모집한 해외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하거나 개인적으로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영어권 국가에서 3~4주간 어학연수를 받기 위해 출국하는 어린이들이었다. 일부 지역교육청에서는 미취학 아동의 영어 교육을 자제하도록 행정지도를 하기도 했지만, 영어 광풍狂風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람난 조기 영어 교육’」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