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진이 돌을 맞이하고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우리 대중음악도 일제 말의 암흑기를 벗어나 다시 한번 힘겨운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음반사들이 문을 닫고 일본인 기술자들마저 떠나 버려 음반을 찍어낼 여력은 없었지만,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일은 계속되었다.
음반 대신 생산비용이 저렴한 노래책을 만들고, 가수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공연을 벌였다. 당시 공연은 일제강점기부터 유행하던 악극 형태였는데, 해방 이후 새로운 악극단이 생겨나 공연이 더욱 활발해졌다. 여기에 김해송과 박시춘, 이난영, 김정구 등 이름난 작곡가와 가수 등이 참여했고 저고리 시스터즈, 아리랑 보이즈 같은 이름도 등장했다. 일제 말 움츠러들었던 대중음악은 다시 한번 대중과 함께 숨 쉬면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 p.40 「해방둥이 김남진의 탄생과 대중음악의 재건」 중에서
남진은 목포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아버지하고 나이 차이가 오십이 넘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였지만, 아버지는 그런 걸 내색하는 분이 아니었죠. 거기다 사업과 언론사에 정치까지 항상 바쁘셨습니다. 가정일과 2남 7녀의 교육은 어머니 몫이었어요. 어머니는 자애로우셨지만, 동시에 엄한 분이었어요. 특히 집에 늦어 들어오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맞곤 했죠.”
그 시절 대궐 같은 집에는 언제나 손님들이 차고 넘쳤다. 그중에는 정치인들도 있었는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조병옥과 신익희, 여성 정치인이었던 박순천 등은 호남 지역에 올 때마다 그의 집에 묵었다고 한다. 당시 정치 신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주 찾았다. 때로는 어린 김남진이 손님들과 한 방에 자기도 했단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갖춘 부잣집 늦둥이 장남을 부모는 엄하게 키웠다. 여기에는 한국전쟁 이후 불어닥친 춤바람 등 향락 문화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 p.50 「미8군 쑈에 빠진 부잣집 도련님」 중에서
처음 며칠은 전쟁터에 왔다는 실감이 안 났다. 밤에 보초를 서고 있으면 영화 촬영을 온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 때 사건이 터졌다.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쉬이익 소리와 함께 포탄이 막사 안으로 날아든 것이다. 선임들은 모두 “포탄이다!” 하는 소리와 함께 엎드리는데, 남진과 바로 옆 신병만 의자에 앉은 채 얼어붙었다.
“진짜 그 포탄하고 거리가 한 2미터도 안 되었던 것 같아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꼼짝 못 하고 있는데, 천만다행 포탄이 터지지 않은 거예요. 불발탄이었던 거죠. 지금도 모래에 박힌 포탄 꽁무니에서 쉬익 하며 돌아가던 프로펠러 소리가 귀에 생생합니다.”
--- p.148 「월남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다」 중에서
바쁜 와중에도 동료 가수들을 위한 활동에 적극 나섰다. 한국연예인협회 가수분과위원회 위원장에 이어 2006년에는 대한가수협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활동이 늘어나니 상복도 잇따랐다. 2014년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을 시작으로 2017년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2020년엔 제1회 트롯어워즈 트롯100년 가왕상을 받았다. 꾸준히 신곡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가던 중 TV 예능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을 시작으로 트로트 열풍이 불자 남진은 각종 경연 무대에 심사위원이자 멘토 그리고 ‘전설의 가수’로 출연하면서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 p.260 「제2의 전성기와 트로트 영풍 부활」 중에서
남진의 인기는 이어졌고, 27년 만에 영화 출연도 하게 되었다. 예지원 주연의 코미디 영화 [대한민국 헌법 1조]에서 욕쟁이 신부 역할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6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조연은 그 영화가 처음일걸요? 예전에 찍은 영화에선 언제나 잘생긴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았으니까요. 목소리도 입만 뻥긋거리고, 전문 성우가 더빙했고요. 하지만 이번엔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욕쟁이 신부님 역할이었죠. 시나리오를 보니 정말 재미있습디다. 코믹한 신부님 역할도 마음에 들었고요.”
--- p.262 「27년 만의 영화 출연」 중
[오빠 아직 살아 있다]. 이 노래는 남진의 음악 인생에 여러 가지 ‘최초’ 수식어를 남겼다. 라틴 댄스 리듬의 곡도, 뮤직비디오 촬영도 처음이었다. 이 노래를 만든 어쿠맨도 남진과 처음 작업하는 무명 작곡가였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 노래를 들었는데, 그게 남진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치 예전에 [둥지] 데모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남진은 ‘오빠 아직 살아있다’를 제대로 부르기 위해 창법도 바꾸고 라틴 댄스도 새로 배웠다. 그의 나이 일흔다섯 살 때의 일이다. 이런 변신이 그를 ‘영원한 젊은 오빠’로 남게 하는 원동력이다. 가수 남진이 끊임없는 변신을 통해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면, 인간 남진은 변함없는 소탈함과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 이것이 오랫동안 그를 알아 온 친구와 선후배, 팬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인간 남진의 매력이다. 그들은 또한 가수 남진이 롱런하는 비결에 대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완벽을 추구하는 프로 정신”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 p.282 「가수 남진과 인간 남진」 중에서
남진의 음악 인생에는 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인연과 행운이 함께했다. 거기에는 남진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있었고, 그를 음악으로 이끈 다양한 인연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변함없이 곁을 지켜주는 팬들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음악은 내 인생의 전부인 것 같아요. 예전에도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너무 바빠서 절반쯤만 몸을 담갔다면, 지금은 노랫말 한 소절 한 소절에 몸 전체를 푹 담그고 싶어요. 그래야 후회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2024년 팔순을 맞이한 남진은 가끔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생각한다. 팬들이 있는 한 죽기 전까지 무대에 서고 싶지만, 몇 시간 동안 무대에 서서 노래하며 춤을 추는 건 언제까지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p.306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