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먼 길을 걸어온 것 같다. 근대의 시작점에서 풍경을 발견했던 인간은 이제 대기를 감지함으로써 날씨의 정동을 읽어낸다. 외부와 확실하게 분리되는 내면을 내려놓자, 언어로 번역될 수 없었던 이미지들이 쏟아져 들어온 셈이다. 속이 빈 주머니가 된 인간은 인식의 역동성을 고스란히 받아 안는다. 쏘고 죽이기보다 담아내고, 하기보다 겪어내는 이 자아의 변화는 병과 치유의 문제 역시 달리 보게 한다. 병은 싸워야 하는 외부의 대상이기보다, 무수히 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이 노화의 여정 속에서 분해를 거듭할 뿐이다. 날씨야말로 역동적인 정동 속에 있으며, 탄생과 죽음은 뒤섞여 구분할 수 없다.
---「강지희, 「눈송이의 노래와 균」」중에서
이때 소설에서 하나의 세계는 개인이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과도 같다. 즉,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다. 영은은 시력을 상실해보았기에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존에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무언가를 잃어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협소한 내면의 세계를 확장하고 다른 사람과 맞닿기 위해서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의 경험이 필수적이다. 상실이 타인의 세계를 경험하고, 자아를 새롭게 변형시키는 하나의 방법이 되는 셈이다.
---「김다솔, 「시력 너머의 시선, 시선 너머의 사랑」」중에서
언젠가부터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우리’라는 말이 등장하거나, 반드시 ‘우리’가 언표화되지 않더라도 그러한 상태를 의식시키는 장면이 적잖이 발견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특히 그것이 ‘시’ 장르에서의 일이었다는 점에 우선은 방점을 찍어둔다. 각 장르의 특징은 단지 스타일, 형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어떤 문학, 예술의 양식이든 거기에는 고유의 앎과 감정의 방식이 구조화되어 있다. 시를 다른 장르와 구별시키는 것은 언어의 음악성을 언표화하는 그것의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그 스타일 자체가 곧 각 장르마다의 세계관을 외화한 것이기도 하다. 즉, 모든 장르를 통틀어 ‘나’라는 주어의 함의에 가장 가까운 세계관의 장르가 ‘시’라고 해도 될 것이다. 세계의 자아화, 서정抒情과 같이 시 장르의 특징을 설명하는 오래된 술어들에는 ‘세계 vs 자아’의 견고한 구도가 놓여 있다. 이것이 곧 ‘바깥’ 세계와 구별되는 개체(개인)로서의 ‘나’ ‘나의 자아’ 등을 전제하는 것임도 잠시 강조해둔다.
---「김미정, 「얽힘을 말하기 시작한 첫 세대」」중에서
마음이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해서 내 마음이 나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의 뜻대로 만들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마음도 감정도 보편적으로 규정되거나 자연적으로 설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범상한 얘기일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에 관한 보편적인 특징으로 말해볼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기분’이라고 불리는 몸의 상태, 즉 “몸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느낌”이다. 뇌가 매 순간 신체 예산 조절에 쓰는 데이터, 즉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장기, 호르몬, 면역계 등에서 생겨나는 심장박동, 호흡, 체온, 신진대사적 욕구 등?을 요약한 정보 같은 것이다. 이것을 (신경)과 학자들은 ‘정동affect’이라고 부른다. 대개 유쾌하거나 불쾌한 것으로 분리되고 얼마나 활성화되었느냐에 따라 다르게 측정되어,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려주는 지표다. 쉽게 이해하자면, 당이 올라가면 기분이 좋아지고 잠이 부족하면 기분이 가라앉는 식의 변형을 통한 지표이므로, 엄밀하지 않다. 또한 전적으로 지각하는 사람에게만 속한 것이므로, 객관적이지 않다. 그리고 신체 신호가 정신적 느낌으로 전환되는 데에 대한 과학적 해명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백지은,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중에서
확실히 정동은 신체와 밀접하게 결합된 영역이다. “정동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단어들은 물질과 비물질, 물리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사이의 경계에 엉거주춤 서 있다.” 정동에 관한 우리의 경험에서 신체, 감각, 감정은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정동은 완전히 육체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신체, 감각, 감정 측면에서 완전하지 못한(적어도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는 작동하지 않는) 기계들이 정동에 관여할 기회는 없을까? 기계 신체와의 정동은 어떤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을까?
제임스 밸러드는 장편소설 『크래시』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한다. 이 소설은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강렬하고 복잡한 욕망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포르노그래피다. 포르노의 주역은 자동차가 맡는다. 자동차는 물론 현대의 테크놀로지 전반에 관한 은유지만, 소설의 일원으로서 그것은 등장인물의 섹스에 핵심적으로 동참한다.
---「심완선, 「기계와 섹스해도 될까?」」중에서
스스로를 퀴어로 정체화한 인물이 여럿 나온다고 해서 그 소설을 곧장 퀴어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라벨링이 중요하다면 그 간단한 사실을 엄격히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특정 인구 집단을 종족화시킴으로써 배제의 기능을 수행해온 성의 역사를 살핀다면 라벨링은 영토 경쟁의 대상이 아닌 그 자체가 문제적 현상이다. 소수자 시민운동과 더불어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퀴어 서사의 대중화가 봉착하는 여러 이슈 중 이 글에서는 성소수자의 재현이 ‘퀴어’를 ‘대상 선택’의 문제로 한정하는 사유와 쉽게 연동되는 것과 그 징후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오은교, 「명사 퀴어와 형용사 퀴어」」중에서
이 글에서는 지난한 다시 쓰기의 작업을 수행하는 소설들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지난하다’라는 표현은 사전적으로는 지극히 어렵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이나, 어쩐지 나에게는 너저분하고 더러운 상태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실제로 수행되는 다시 쓰기의 작업이란 너저분하고 더러 운 흔적을 꼼꼼히 살피고 챙기는 일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지. 아무래도 다시 쓰기란 잘 드는 면도날을 이용해 더러운 것을 깔끔하게 잘라내는 일이나, 잘 떼어지는 스티커를 떼어내고 새로운 리무벌 스티커를 붙이는 것과는 매우 다른 작업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다. 그보다는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잘 지워지지 않는 흔적에 입김을 불어가며 지워보려 하다가도, 끝내 그 흔적을 보존하며 전혀 뜻밖의 그림을 그려내는 일에 가깝지 않을지. 이로써 우리는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
---「전기화, 「사랑으로 다시 쓰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