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보기에는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무조건 싸우자는 주전, 곧 척화론이 헛된 명분론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다수의 위정자에게도 그것이 과연 헛된 명분론에 지나지 않았을까? 무엇과 대조해 볼 때 헛되다는 얘기인가? 조선왕조라는 나라를 기준으로 볼 때 헛되다는 의미인가? 하지만 우리 개개인은 항상 나라를 가장 중시하는가? 목숨이나 명예, 재산이나 기득권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나라야 망하건 말건 자기 잇속을 먼저 생각한 사례는 인류 역사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따라서 척화론을 헛된 명분론이라 몰아세우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판단 기준과 논증이 필요하다. 국가를 개인으로 축소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목숨을 기준으로 삼아 헛되다는 뜻인가? 하지만 지금도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자살률은 한국이 세계 1등인 지 벌써 오래다. 그렇다면 자살은 모두 헛된 행위일까?
--- p.6, 「책머리에」중에서
솔직히, 조선 후기 정치·지성사의 흐름은 병자호란이 남긴 충격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그 충격을 상쇄하기 위한 자기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벌이니 소중화니 하는 시대적 담론은 삼전도 항복과 명청 교체의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자구책의 대표적 사례였다. 엄밀히 말해서, 조선왕조는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뒷장으로 넘어갈 때까지도 후유증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항복의 후유증이 그토록 오랫동안 심각하게 작용한 이유는 그 사건은 일회성으로 끝날 치욕 정도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 문제와 직결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그 자체보다는 삼전도에서 행한 항례가 조선 조야에 훨씬 더 크고 깊은 충격을 주었다.
--- p.22, 「1장. 프롤로그: 왜 국가정체성 문제인가?」중에서
1622년의 칙서 거부 사건은 광해군의 외교가 은밀하게 명을 속이는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명을 기피하는 단계로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이 시기 광해군의 태도는 꽤 단호하여, 칙서를 아예 받지 않을 정도였다. 조선 사신들이 받아 온 칙서의 영칙례를 자꾸 연기하며 사신과 칙서를 영은문 밖에 무한정 머무르게 하였다. 정변을 맞아 강제 폐위당할 때까지도 두 통의 칙서를 5개월이 넘도록 받지 않고 있었다. 조선 역사에서 칙서를 이렇게 오랫동안 도성 밖에 방치한 왕은 오직 광해군뿐이다. 감군이 한양에 머물던 바로 그 시간에도, 황제의 징병 칙서는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후금에는 우호적인 답서를 보내라고 독촉한 광해군의 태도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 p.52~53, 「2장. 해군 대 말엽 외교 노선 양상과 정사 논쟁, 1618~1622」중에서
조선의 사대부는 도통이니 학통이니 종통이니 하며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정통을 따지는 주자학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어떤 문제를 놓고 그에 대한 평가가 정론과 사론으로 갈렸다면, 그 문제는 대화를 통해 절충점을 찾기 어려운 사안임을 뜻하였다. 대명 사대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 조선 양반 엘리트의 눈에 ‘중립’은 그 자체로 군부의 나라에 등을 돌리는 패륜 행위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 문제의 핵심은 정책 대결이 아니라 조선의 ‘국가정체성’ 논쟁이었다. 또한 이것은 최근 한국 사회의 한미 관계와 한일 관계 논쟁 및 대북 정책 논쟁과도 흡사한 면이 있다.
--- p.61~62, 「2장. 해군 대 말엽 외교 노선 양상과 정사 논쟁, 1618~1622」중에서
누르하치는 서부 전선에서 명과 대치하는 중에 후방의 조선을 공격한다면 조선의 태도도 더욱 분명해질 테고, 그리하여 앞뒤 두 개의 전선에 갇히는 꼴이 되면 후금에 유리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조선의 회신을 받기까지 2년이나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다. 이 점이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품은 조선 정책의 결정적 차이였다. 이런 형세가 후금이 요동을 장악한 1621년 봄부터 정묘호란 발발 직전까지 이어졌다. 이는 곧 누르하치 때나 홍타이지 때나 국내외 정세에 특별한 차이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러함에도 누르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등극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후금은 최후통첩이나 선전 포고조차 없이 갑자기 조선을 침공하였다. 그렇다면 후금의 조선 침공 동인은 무엇이겠는가?
--- p.87, 「3장. 정묘호란의 동인과 목적, 1623~1627」중에서
조선 후기에 정론의 대척점에 있던 논의를 표현하는 말은 사론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주화와 척화가 정면충돌한 상황에서 척화론을 정론으로 봤다면, 그 상대인 주화론은 이단사설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 이런 상황이었기에 조선이 외교적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척화론이 정론인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명 황제와 조선 왕이 충과 효에 기초한 군부·신자 관계로 묶였기 때문이다. 서신을 주고받을 때 명의 연호를 쓰지 말라는 후금의 요구에 척화론이 들불처럼 일어난 이유도 바로 조선은 명의 신자라는 관계성, 곧 국제 무대에서 조선의 위상이자 국가정체성 문제와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 p.87, 「4장. 척화론의 양상과 명분, 1627~1642」중에서
유교적 사대자소가 일반 상식이던 ‘중원’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 군부·신자 관계로 이념화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매우 특이하였다. 개인끼리라면 모를까, 냉혹한 국제 무대에서는 아무리 이념적으로 끈끈한 관계라 해도 시세 변화에 따른 다양한 합종연횡이 오히려 상식이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그런 변화 곧 ‘황제 갈아타기’를 극도로 거부하였다. 심지어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명과 조선의 관계를 이념화하였다. 왜 그랬을까?
--- p.110, 「4장. 척화론의 양상과 명분, 1627~1642」중에서
삼전도 항복 후 청의 징병에 대해 조선 조정이 보여준 태도는 광해군의 친후금 외교 노선에 반발했던 신료들의 숭명배금 의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그 이념적 뿌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뀔 수 없는 명과 조선의 군부·신자 관계였다. 따라서 정명에 동참하라는 청의 요구에 조선은 지극히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훗날 남경에서 청군에게 붙잡힌 임경업이 조선으로 송환돼 처형당한 이후, 조선 사회는 그를 숭명배청 의리의 화신으로 추켜세웠다. 그를 기리는 사업과 전기류 소설이 널리 회자한 사실은 당시 양반 지식인 사회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 사이에서도 숭명배청 의식이 지배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 p.119, 「4장. 척화론의 양상과 명분, 1627~1642」중에서
16세기를 거치면서, 명과 조선 사이 기존의 군신 관계에 부자 관계가 추가된 역사적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것이 바로 조선왕조의 새로운 국가정체성이었다. 부자 관계가 상황 논리를 초월하는 절대 가치로 자리 잡은 이상, 청이 새로운 천명을 내걸고 명을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 문제가 필연적으로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선의 국가정체성이 명이라는 국가 하부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주권 국가로서의 정신적 자율성이 사실상 없다 보니, 외부 세계의 변화에도 주체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 p.157, 「5장. 전쟁 원인의 기억 바꾸기, 1637~1653」중에서
북벌 담론은 조선왕조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매우 중요하게 기능했다. 처음부터 현실성이 없는 정치 선전에 가까웠지만, 북벌론은 한동안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곧 명질서가 무너지고 천자가 사라져버린 절체절명의 국가 위기 속에서 국왕과 지배양반층은 이해관계를 함께해 절치부심의 북벌 담론을 생성하고 공유함으로써 조선왕조의 레종데트르를 다시금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삼전도 항복 이후 흐트러진 국내의 인심과 분위기를 조선왕조라는 깃발 아래 다시 하나로 규합할 수 있었다. 청을 상대로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겠다기보다는 삼전도 항복 이후 위기에 봉착한 국내 통치 질서와 기존의 양반 지배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국내용 정치 선전이었다.
--- p.168, 「6장. 북벌론의 실상과 기억 바꾸기, 1649~1690」중에서
효종 재위 10년간 효종의 정통성을 받쳐준 큰 논리가 바로 북벌이었는데, 막상 그 북벌은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북벌의 대상이던 오랑캐의 요구에 따라 출정해 그 지휘를 받은 이율배반적인 문제가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점 때문에 나선정벌은 북벌과 묘한 함수 관계를 맺으며 얽혔다. 북벌 이데올로기가 사실상 종말을 고하는 17세기 말 숙종 때에 이르러 나선정벌을 대하는 조선 조야의 시각이 새롭게 바뀐 점이 바로 그것이다.
--- p.188~189, 「6장. 북벌론의 실상과 기억 바꾸기, 1649~1690」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