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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림판 작가 허아른의 소설 분투기 : 소재는 일상 내용은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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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6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284쪽 | 300g | 128*188*20mm
ISBN13 9791163165477
ISBN10 1163165476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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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근처에 긴 굴다리 하나 있는 거 알지? 평소에는 그리로 잘 다니지 않지만 가끔 지날 때가 있거든. 아주 가끔. 얼마 전에 그 굴다리를 따라서 집에 왔어. 버스 노선이 임시 중단되는 바람에 좀 돌아서 가야 했거든. 저녁때였는데, 아무도 안 다니는 길이잖아. 엄청나게 조용하더라. 조용한 굴다리를 걷고 있으니, 따각따각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서… 어쩐지 집중하게 되더라고. 그 소리에. 그러다 보니 어렴풋이 알겠더라. 그 예쁜 소리가 왜 그렇게 거슬렸는지.
안 맞는 거야. 내 발이 움직이는 거랑 소리가. 한 박자 느리거나, 한 박자 빠르거나. 아주 미세하게 안 맞아. 마치, 내 보폭에 맞춰서 누가 따라오는 것처럼. 한 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멈출 수가 없더라.
---「따라오는 구두」 중에서

그날 밤이었나 아니면 며칠 후였나. 꿈을 꿨어요. 검은 눈의 그것이 내게 머리를 바싹대고 있었어요. 그리고 자기 몸의 살을 뜯어내 계속 내 입속으로 집어넣고 있었죠.
‘어때, 맛있지?’
‘어때, 맛있지?’
‘어때, 맛있지?’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거품의 맛, 피비린내, 한참을 시달리다가 몸서리를 치며 깨어났어요. 얼굴에는 눈물이 번져 지저분하게 번쩍였고―아아, 비늘처럼―깨고 난 후에도 입안의 비릿함이 가시지 않아 몇 번이고 토해야 했죠.
그 이후로 저는 생선회를 도무지 먹을 수 없었어요.
---「터진 계란 후라이처럼」 중에서

엄마는 마흔이 채 못되어서, 꽤 이른 나이에 죽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치 건전지가 다된 기계처럼 픽- 하고 꺼졌다. 엄마가 죽고 나서는 아빠도 뭔가가 꺼진 것 같았다. 혼이, 정신이, 어쩌면 생명이 꺼져버린 것 같았다. 아빠는 나중에 그 시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그런 생각만 가득했었어.”
엄마가 없는 인생은 계획에 없었다는 괴상한 표현을 하기도 했다. 괴상하긴 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잘 견뎌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멀쩡하게 회사를 나가고, 집에 와선 딸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청소도, 빨래도 빈틈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엔, 꺼져 있었다. 아빠가 다시 살아난 것은 엄마의 노트북에서 하나의 워드 파일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백 페이지에 달하는 쑥 요리 레시피였다. 엄마가 오랫동안 수집해 온 레시피. 아빠는 그것을 사랑의 문서라고 표현했다.
---「짙푸른 봄을 마대에 담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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