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이해할 수 없는 미련에 사로잡힌 여자가 다시 문 안쪽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남자는 여자의 눈길을 따라 극장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오디오 기기라면 몰라도 오디오 극장이라는 장소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유리문 안쪽에 있는 아야미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 p.25
촛대가 쪼그라들면서 슬프게 구부러졌다. 그 모습은 불가피하게 기묘한 사랑의 종말을 알렸다. 열대의 시간이 끝나갈 즈음 그들은 재만 남았다. 그들은 불투명한 회색빛 유령이 되었다. --- p.30
어린 아야미는 길을 걷다가 조그만 푸른색 돌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는데, 돌 아래 깊은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구멍은 동시에 존재하는, 거울 반대편의 세상으로 통하는 구멍이었다(고 누군가로부터 들은 기억이 떠오른다). 깜깜한 구멍 저편으로는 또 하나의 아야미가 또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 pp.84~85
“(...) 육체가 교통하는 요소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다른 통로를 통해서도 지금 내가 당신을 아는 것처럼, 그리고 당신이 나를 아는 것처럼 존재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열락의 거울상이 없다면, 우리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세 개의 동굴은 세 개의 거울이에요. 사랑은 알려지지 않은 동굴을 찾아 헤매는 행위지요. 지상 어딘가에 있는, 깊고, 어둡고, 울림이 있으며, 증폭하고, 두렵고, 홀리게 만드는, 그리고 온전하게 사적인, 나를 위한 비밀, 단 하나의 배(ship), 단 하나의 숨겨진 장소…….” --- pp.135~136
“그림자의 군사들이에요” 하고 아야미가 볼피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듯 말했다. “내 팔을 잡아요. 이 도시의 숨겨진 이름은 ‘비밀’이랍니다. 이 도시에서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를 잃어버리게 되어요. 모든 것은 너무 빠르게 세워지고, 너무 빠르게 사라져버린답니다. (...)” --- p.194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줘요.” 아야미는 기우뚱거리며 사람들 사이로 멀어져 가는 늙은 시인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리듯이, 혹은 애원하듯이 말했다. “지금 당신이 가고 있는 그 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다줘요.”
꿈은 잠에 속한다. 잠은 야행성이고, 그만큼 낮에 이루어지는 꿈은 기이하다. 밤과 잠에서 차례로 끄집어내어진 꿈은 더욱 기이하다. 잠 밖으로 꿈을 꺼내려는 욕망은 위험하다. 물 밖으로 꺼내어져 몸을 뒤트는 생선을 향해 숨을 쉬라고 명령하는 것은 미쳤거나 우습다. 그러니 우리의 시선은 팔딱대는 생선이 아니라 생선을 움켜쥔 손에 닿아야 한다. 꿈을 움켜쥔 손, 꿈을 포획하려는 불가능한 욕망. 내가 적을 것은 그것이다. 펼쳐진 꿈이 아니라. 물론 그 손에 대해서 말하려는 욕망 또한 또 하나의 움켜쥐려는 손이다. 그러니 당신의 시선이 머물러야 하는 곳은 그곳이다. 길을 잃고 싶지 않다면, 이 매혹적인 덫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