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경에 처한 사람을 모른 척 한 적 있나요?
… 전 있어요.
--- p.20
그나저나, 저는 언제까지 골방에 처박혀 밑줄만 그으려는지. 쪼잔하게.
--- p.27
당신은 당신을 다 아나요? 저는 이 나이에도 매일 새로운 구석을 발견하는 재미로 사는데요. 어디에 이런 게 숨어 있었지? 새로 만난 나와의 반가운 악수.'
--- p.57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깜깜해도 이 계절이 끝나갈 즈음엔 분명 남은 게 있을 거예요. 우릴 성장시킬 무언가가. 이 여름 끝자락엔.
--- p.58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굳건한 확신이 매번 흔들리는 과정일 수도 있으니까요.
--- p.62
혐오가 피해의식, 공포에서 나온다면, 그렇다면 공포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영화 [올드보이]에서는 “있잖아. 사람은 말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라고 했는데, 어떤 상황이나 상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괴로운 상상력이 공포로 다가온다는 말이겠죠.
--- p.100
우리는 우리와 ‘다른’ 누군가로 인해 우리의 행복을 망쳤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요? 정작 우리 행복을 망친 건 우리 자신이 아닐는지요. 우리와 ‘다른’ 이들을 틀렸다고 몰아세우며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숨긴 채 그들을 제대로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우리 자신.
--- p.108
노만처럼 여태 아무도 해보지 않은 걸 해보기. 이를테면, 어깨를 내어주고 마음으로 들어주기. 당신이랑 닮고,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이 어딘가 있다는 걸 기억나게. 그리고 곁에 있어 주기. 몸과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나랑 같이 혼자 있자. 그러고 나란히 걷자.”
--- p.110
복권을 사지도 않고 복권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그림이나 글쓰기에 아무런 연습도 준비도 하지도 않고 짐처럼 쌓아두고만 있는 건 꿈이라고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냥 미련이겠죠.
--- p.120
영화 따위 하지 않더라도 하루하루가 충분히 영화 같은 날들이었어요.
--- p.122
쓰면서 알았어요. 현실에선 그렇게 만나기 힘들던 사람들이 노트북 안에 죄 모여 있다는걸. 나랑 표정이, 걸음걸이가, 보폭이, 걷는 방향이 닮은 이들. 좋았어요. 글만 생각하고 글로 꿈꾸는 내가, 그런 날들이, 그 길이. 그 길가에 드는 볕이. 그 볕을 함께 보고 쬐는 이들이.
--- p.137
내가 겪고, 내 주변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들을 모은 블랙박스 영상들이 있다고 해서 그게 과연 내 인생의 복제품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더군요. 내 삶의 시간의 객관적 사실만을 모아서 재편집했다고 했을 때, 그것이 내 인생과 같을 수 있을까 하는.
--- p.140
‘아름다움’이라는 걸 처음 느꼈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 p.147
우리는 자라면서,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고 사는 것이 성실한 삶이다’라고 배웠지만, 사실은 그게 바로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의 한나처럼 자신도 모르게 타인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두 눈을 부릅뜨고, 끊임없이 자기 주변을 살피지 않으면 말이에요.
--- p.151
제가 영화 [시]에서 느낀 아름다움은 이런 거예요. 어린 소녀가 강간당해 자살한 이야길 세상 사람들한테 해야겠다. 이창동 감독의 그 마음 먹음. 추악하고 구린내 진동해도, 아니, 그래서 더 불빛을 들이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까발리자. 이창동 감독 마음에서 일어선 그 용기.
--- p.155
여전히 음식은 사람들의 삶이나 관계를 비춰주는 조명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는 생각합니다. 상대를 축하하거나 격려 또는 위로하려고 할 때, 상대와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할 때, 상대와 같은 식탁에서 밥 한끼 먹음으로써 내가 그와 같은 편에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같이 식사를 합니다. 그래서 '식구(食口)’라는 말이 있는 거 아닐까요?
--- p.171
내게 있어서 진정 영화 같은 삶이란, 또다시 미국 TV 애니메이션 하청일의 한 개 톱니 바퀴로 사는 것보다 가계의 안정이나 이민 정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이었던 거죠.
--- p.180
복권 안 산 지 좀 됐어요. 왜냐고요?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세상에 살면서 설마하니 돈이 싫어서는 아니고. 음… 목 빠지게 기다릴 미래가 없어서. 돈으로 사고 싶은 설렘이 없어서.
--- p.181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 공주처럼, 모든 세포가 글자로 흩어지고 날아갈 때까지… 쓰고 싶어요.
--- p.183
계획도 뭣도 없이 여기까지 흘러왔어요. 그렇게 또 흘러가지 않을까요? 그러고 싶어요. 어디로든. 어떻게든, 흘러가기나 했으면.
--- p.185
중요한 건 지금 핸들에 손 올리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 길이 벗어날 수 없는 뜨거운 태양열로 지글거리는 꽉 막힌 도로든 뻥뻥 뚫린 도로든.
--- p.186
요즘 저는… 편파적이고 싶어요. 어떤 무리엔 무조건적으로 편들고 싶어요. 그러니까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볼 수 없는 이들의 눈이 되어주고 만질 수 없는 이들의 손이 되어주고… 나한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는 몰라도, 자꾸만 기울어요. 한쪽으로 쏟아지는 마음.
--- p.201
맨날 밥 먹고 행복하게 살 궁리만 하는 사람들은 저렇구나. 저 무거운 상자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인상 한 번 안 쓰고 입을 맞추네. 한여름 감기에 걸린 할머니를 위해 삼복더위에 옥상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토종닭 모가지를 비트는 할아버지. 그 더운 날 토종닭을 삶아왔다고 눈물을 철철 흘리는 할머니. 맨날 사랑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저렇게 사랑을 하는구나. 저렇게 땀과 눈물을 떨구면서.
--- p.214
오히려 제겐 인생에 있어서 ‘고독’은 삶의 기본값 정도로 봐야 하는 게 아닐지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자신과 더 많이 대화하고, 사랑하고, 부끄러운 일을 반성하고, 후회하는 일을 곱씹고, 이러면서 사람은 성장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 p.221
작년에도 여름은 왔고 내년에도 올 테지만 방금 떠난 여름은 아닌.
--- p.263
언젠가 상업영화를 다시 하게 되면, 형이랑 같이 이 영화의 리메이크를 가장 먼저 하고 싶었어요. 통독 과정에서 변화된 독일 사회를, IMF를 거치면서 각자도생으로 바뀐 한국 사회로 바꿔서 말이죠. 언제쯤 만들어질지, 과연 투자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 영화이지만….
그래도, 엔딩 크레딧에 맨 처음 나오는 이름은 형 이름이 될 거예요. 형. 정말, 미안했고, 고마웠어요.
--- p.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