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와주세요, 사랑하는 할아버지,’ 반카는 편지를 이어갔다. ‘예수님 이름으로 저를 여기서 데려가주길 빌어요. 불쌍한 고아를 가엾게 여겨주세요. 다들 저를 때려요. 배가 너무 고프고, 말도 못하게 힘들어서 눈물만 나와요. 저는 하루종일 울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주인이 구둣골로 머리를 때리는 바람에 기절했다가 간신히 깨어났어요. 저는 개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알료나와 애꾸눈 예고르카, 그리고 마부 아저씨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제 손풍금은 딴사람한테 주지 마세요. 이반 주코프는 언제나 할아버지의 손자입니다. 저에게 와주세요.’
--- p.34 「반카」중에서
하기야 죽음이 모든 인간의 정상적이고 필연적인 결말이라면,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해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어떤 장사치나 관리가 오 년이나 십 년을 더 산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만약 의술의 목적이 약이나 치료를 통해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라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뭐하러 고통을 덜어주지? 첫째, 고통은 인간을 완성의 길로 이끌어준다고 하지 않는가? 둘째, 만약 인류가 알약과 물약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정말로 치료할 수 있게 된다면, 인류는 종교와 철학을 완전히 버리게 될 것 아닌가?
--- p.71 「6호실」중에서
인간은 왜 이런 상실과 손해 없이 살 수 없는 것일까? 자작나무며 소나무들을 뭣 때문에 다 베어버렸을까? 이 목초지는 어째서 일없이 놀리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사람들은 항상 꼭 필요한 일을 하지 않고 그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일까? 어째서 야코프는 평생 욕을 하고, 으르렁대고, 주먹을 흔들어대며 자신의 아내를 함부로 대했는가? 좀전에는 뭣 때문에 그 유대인을 겁주고 능멸한 것일까? 아니, 도대체 왜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망치는가? 그래서 바로 이런 손해들이 생기는 것 아닌가! 이 얼마나 끔찍한 손해인가!
--- p.149 「로트실트의 바이올린」중에서
노파가 울었던 것은 그의 이야기 솜씨가 감동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베드로가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며, 또한 그녀가 자신의 전 존재로 베드로의 영혼 속에서 일어난 일에 몰입했기 때문이리라.
갑자기 그의 영혼 속에서 환희가 물결쳤다.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춰야 할 정도였다. 그는 생각했다. 과거는 차례로 전개되는 사건들의 끊임없는 사슬을 통해 현재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는 방금 자신이 그 사슬의 양쪽 끝을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쪽 끝을 건드렸더니 다른 쪽 끝이 움직인 것이다.
--- p.160 「대학생」중에서
“그런데 우리가 답답하고 비좁은 도시에 살면서 하잘것없는 서류를 작성하고 카드놀이를 하는 것, 이건 상자 속 삶이 아닐까요? 혹은 우리가 놈팡이들, 소송꾼들, 어리석고 게으른 여자들 틈에서 평생을 보내면서 온갖 헛소리를 말하고 듣는 것, 이건 상자 속 삶이 아닐까요? (…)”
--- p.185 「상자 속의 사나이」중에서
‘너무 맛있어!’
그리고 그는 허겁지겁 구스베리를 먹으며 연신 되풀이했습니다.
‘아, 너무 맛있다! 형님도 좀 드시우!’
구스베리는 딱딱하고 시었지만, 푸시킨이 이런 말을 했죠. ‘우리를 북돋워주는 기만은 진실의 어둠보다 소중하다’라고요. 저는 한 명의 행복한 인간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염원을 확실히 실현한 인간, 인생의 목표를 성취하여 자신이 바라던 것을 얻고, 자신의 운명과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는 인간을. 예전에도 저는 인간의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무슨 까닭인지 묘한 슬픔을 느끼곤 했는데, 지금 이 행복한 인간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거의 절망에 가까운 괴로운 심정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 p.200 「구스베리」중에서
오, 그녀가 어찌나 그애를 사랑하는지! 그녀는 여태껏 어떤 상대에게도 이처럼 깊은 애착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영혼이 지금처럼 헌신적으로, 사심 없이, 기쁘게 굴복했던 적은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모성애가 점점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남의 식구인 이 소년을 위해, 그의 볼에 팬 보조개를 위해, 학생모를 위해 그녀는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기쁨에 차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고? 그 이유를 누가 알겠는가?
--- p.244 「귀염둥이」중에서
“어떻게 하지? 어떻게?” 그는 머리를 감싸쥐며 물었다. “어떻게?”
좀더 지내다보면 해결책을 찾게 될 것도 같았다. 그때는 새롭고 멋진 삶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끝은 아직 저멀리 있고,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 pp.275-276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중에서
안녕, 내 고향! 갑자기 온갖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안드레이, 그의 아버지, 신혼집, 벌거벗은 여인과 꽃병. 이 모든 것은 더이상 그녀를 위협하지도, 괴롭게 하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유치하고 사소하게 느껴졌으며 계속 뒤로 뒤로 멀어져갈 뿐이었다. 두 사람이 객실에 자리잡고 나서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토록 커다랗고 심각해 보였던 과거의 그 모든 일은 작은 덩어리로 쪼그라들어버렸고, 이제까지는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띄지도 않았던 미래가 장대하고 광활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 pp.301-302 「약혼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