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참 용감했다. 남편과 나, 둘만도 아니고 세 아이와 함께 맨땅에 헤딩하는 귀촌 라이프라니!
어쩌면 그랬기에 시골살이를 피부 깊숙이까지 느낄 수 있었고 단지 로망이 아닌, 몸으로 부딪치면서 알아가는 현실적인 귀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귀촌에 대한 준비와 계획을 좀 더 철저히 하고 이주를 했다면 시골살이의 시행착오를 덜 겪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을 계획하고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했을테고,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면 귀촌은 마음만으로 끝날 것 같았다. 그래서 용기 있게 떠났고 양양에 정착 중이다. 연고 없는 양양에서 준비 없이 시작한 귀촌 여정은 생각보다 아프고 힘든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삶의 시야가 넓어졌고 이곳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용기 또한 가지게 되었다.
어느덧 귀촌 5년 차가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양양의 매력을 하나, 둘씩 발견하고 다양한 색깔을 가진 곳이구나 느낀다. 시골스럽지만 그 안에는 세련됨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르신이 많긴 하지만 다양한 생각을 가진 내 또래 젊은이(시골에서는 내 나이면 젊은이다!)들 또한 점점 많아지고 있다. 다양한 문화와 삶의 양식이 함께 맞물려 가는 곳이기에 양양에서의 내 삶이 더욱 풍성하고 넉넉해지는 듯하다.
『양양에 귀촌했습니다』는 양양에 살면서 겪고 느낀 에피소드를 엮은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단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귀촌’을 생각한다면 누구나 겪음 직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의 경험으로 인해 그 누군가에는 간접경험으로, 누군가에는 현실적인 조언으로, 또 누군가에는 흐뭇한 지나온 추억으로 읽힌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 「프롤로그」중에서
나는 예민한 엄마였다. 지금은 열세 살 된 큰아이가 네 살 되던 해부터 미세먼지와 방사능을 신경 쓰고 살았다. 우연히 알게 된 미세먼지와 방사능은 내게 큰 두려움이었다. 미세먼지가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때 나는 매일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했고, 미세먼지가 많은 날은 아이들에게 마스크를 씌워 유치원에 보냈다. 간혹 ‘나쁨’ 수치를 보였던 미세먼지는 아이가 6~7살이 되면서 급격히 나빠지더니 학교에 들어간 후로 좋은 날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집에는 매일 공기청정기가 돌아갔고 아이들이 외출할 수 있는 날은 드물었다. 미세먼지 앱에는 방독면 그림의 최악 알람이 빈번히 떴는데 아이들은 콧물을 달고 살았고, 기관지염으로 병원에 자주 갔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은 시절이었다.
그 시점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를 많이 생각했다. 아빠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했고 양보다는 질적인 면을 추구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셨던 아빠 덕분에 어린 시절 나는, 여름방학이면 깊숙한 시골 계곡이나 바다에 텐트를 치고 며칠씩 지내곤 했다. 유년 시절의 그런 기억은 마음 한켠 깊숙이 자리 잡았고 도시 토박이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시골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들을 시골에서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던 내게 미세먼지에 대한 두려움은 귀촌을 실행에 옮기게 했다.
--- 「양양에 왜 귀촌했니?」중에서
모두가 의아해했다. 주위 어르신들은 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봤다. “시골에서 뭐 해 먹고 살래.”부터 시작해 “돈이고 사람이고 다 서울로 모이는데 왜 시골로 들어가려 하느냐.”며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삶을 실패로 여겼고 또래 지인들은 귀촌 결심을 응원해 주면서도 ‘설마 진짜로 내려갈까?’라고 생각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처럼 귀촌할 결심을 하자마자 운영하고 있던 가게와 살고 있던 집을 내놓았다. 그 당시 경기가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우리가 내고 들어왔던 권리금을 받을 수 있었고, 가게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집도 순차적으로 매매 되었다. 그렇게 삶의 터전이었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양양에 집만 구해 이사를 왔다. 두려움보다는 무엇을 해서라도 먹고 살 자신감이 더 컸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양양에서도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젊은 사람은 누구나 서울 같은 도시에서 살려고 하는데 왜 일부러 시골에 들어와서 사느냐며 뭔가 잘못해서 도망 온 건 아닌지, 정상인 사람은 맞는지, 참으로 다양한 시선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사 올 당시 우리가 이 마을에서 제일 젊은 부부였다.
--- 「설마! 진짜 맨땅에 헤딩한 거야?」중에서
다음 날 아침, 온통 하얗고 하얀 세상. 아이들이 꺅꺅 돌고래 소리를 내면서 기쁨과 행복에 겨워 눈 속에 파묻혀 뒹굴고 있었다. ‘아! 설경이 그림처럼 멋지다. 살면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니!’ 영화 러브레터의 명장면, 설원 속 주인공이 외치던 오겡끼데스까가 떠오르는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바라봤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하얀색으로 물들었고, 하늘의 태양에 반사되어 온 세상이 눈부시게 빛났다. 소나무 가지 위로 켜켜이 쌓여있는 눈이 바람에 스칠 때마다 하염없이 떨어져 마치, 만화영화 ‘겨울왕국’의 한 장면을 실사판으로 보는 것 같았다. 정말 아름답다고 느끼며 설경을 감상하던 찰나, 나는 곧 현실을 깨달았다.
“아! 갇혔다, 갇혔다, 갇혔다!!!”
그렇다. 우리는 고립된 것이었다. 폭설 주의보가 내린 다음 날이면 신문이나 뉴스에서 볼 수 있던 고립 이야기가 먼 산골짜기, 남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다. 낮은 산이 쭉 둘러있는 우리 마을은 골짜기마다 몇 가구씩 살고 있다. 도로포장이 잘 된 큰길에서 작은 시골길이 시작되는 길을 따라 7채의 집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집, 그 집이 우리 가족 보금자리이다. 우리 집에 오기 위해 거쳐오는 작은 시골길은 매 계절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소박하고 정겨운 길이다. 시골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던 그 길이 폭설로 고립된 오늘, 더 이상 아름다운 길이 아니었다.
--- 「폭설 고립? 남의 일이 아니었어」중에서
귀촌을 꿈꾸는 대부분 사람의 가장 큰 로망은 전원주택을 짓는 것이다. 사실, 나는 전원주택에 대한 로망은 없었다. 단지 한창 자라나는 세 아이가 있고 시골에서까지 아파트에 살고 싶진 않았기에 귀촌지를 정하고 주택을 알아봤다. 시골에는 주택이 많으니 집을 구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시골에서 주택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아파트는 많은 매물이 있었지만 주택, 특히 우리 가족이 지낼 만한 조건의 주택은 찾기 어려웠다. 양양에 있는 많은 부동산을 가봤지만 마땅한 집이 없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몇 주에 걸쳐 부동산을 돌아보고 귀촌 카페도 검색하면서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매물이나 전세, 월세로 나온 주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우리에겐 300평이라는 대지가 있지. 집을 짓자!’
우리는 많은 고민 끝에 집을 짓기로 했다. 서울에서 살던 집을 정리한 돈으로 땅을 사고 새로 집을 지으면서 다 쓰고도 모자라 대출받아야 했다. 하지만 1금융권에서 시골 전원주택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 어쩔 수 없이 2금융권에서 다소 높은 이자를 내고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양양군에서 저금리로 대출해 주는 지원도 있었는데 이미 토지와 주택을 구입한 우리는 해당하지 않았다. 막상 이런 사실을 알게 되니 사전에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귀촌한 건 아닌지, 후회됐다. 작게라도 본인 일을 하고 싶었던 신랑은 집과 땅에 돈이 묶이니 자금 부족으로 시작할 수 없었다.
--- 「전원주택 살아보니 어때?」중에서
"엄마! 서울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귀촌 후 아이들과 함께한 첫 서울 나들이였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이라는 익숙함에, 양양 생활이 적응 중이라는 이유로, 쌍둥이가 어려 아이 셋을 데리고 다니기 버겁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서울 여행이었다. 고학년이 된 큰아이를 위해서라도 대도시 모습을 자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서울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저녁이 되어 아이들과 숙소 근처 남산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오랜만에 느끼는 저녁의 활기참이 새삼 반가웠다. 남산 공기 내음을 따라 들려오는 사람들의 왁자지껄 대화 소리, 줄줄이 서있는 자동차 모습, 식당과 카페의 네온 불빛을 눈과 귀에 담으며 걸으니 어느새 용산도서관에 발길이 닿아 있었다. 용산도서관은 우리가 귀촌 전 살던 동네인 후암동에 있는 국립도서관이다. 집에서 걸으면 2~3분 거리라 큰아이와 자주 들렀던 곳이었다. 용산도서관 맨 위층은 남산과 바로 이어지는 곳이라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높은 빌딩이 뿜어내는 불빛과 세련되고 화려한 건물의 조화로움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중략...)
자연과 함께한 풍성하고 귀한 경험이 아이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자산이 될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과연 잘한 선택이었을까 하는 것은 ‘아이들이 어림에도 불구하고’ 서울 집을 팔고 이사 온 것, 양양의 깊숙한 시골 마을에 땅을 사고 집을 지은 것, 그럼으로써 유동자산을 남김없이 다 써버린 것, 현실적인 것들이다. 아이들이 커간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아차 싶은 마음,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간극. 난 무수한 점들로 된 그 간극들을 하나하나 메우며 고심한다.
‘서울 집을 전세 놓고 와야 했나….’, ‘아이들이 혼자 왔다 갔다 하기 좋은 읍내에 살아야 했나….’, ‘집을 짓지 말아야 했나….’
여러 생각이 들지만 귀촌 전으로 돌아가 다시 결정의 시간이 온다 해도 나는 또다시 양양 북분리, 아담하고 소박한 이 마을을 선택했을 것이다. 다만, ‘커가는 아이들’에게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우리 삶을 계획했을 것이다.
--- 「엄마! 서울이 더 좋은 것 같아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