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이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기정체성에 관한 실존론적 질문과 신의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을 계속하며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형성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자기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이나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관한 질문과 절대적 존재로 표상될 수도 있는 신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_17쪽, 《신, 그는 누구인가?》 중에서
창세기 2장은 신(神)과 흙(土)의 관계에 역점을 두고 있다. 흙은 신이 인간과 각종 동물을 창조할 때 사용한 질료이며, 초목과 채소가 생명의 뿌리를 내리는 땅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흙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은 흙과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에 있다. 신?토는 불이(不二)하다는 것이다.
_32쪽, 《신토불이 신학》 중에서
언제부터인가 기독교를 ‘절대종교’, ‘고등종교’ 등으로 규정하며 기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류 방식의 저변에는 타 종교를 ‘상대종교’나 ‘하등종교’로 격하하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에 부응하는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학의 학문성마저 가장 체계화된 것으로 간주하며 신학의 절대주의를 역설한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본질을 절대화하기 위해서 신앙의 형식을 상대화하는 것 정도는 신학적으로 크게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신에 대한 신앙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을 어떻게 신앙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_36쪽, 《기독교 신학의 문제》 중에서
인식은 의식을 결정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성?감성?의지에 의해 사물을 지각하는 과정에서 인식능력은 지각된 상을 의식내용으로 전환한다. 만일 의식형성에 회상착각(D?j??vu?Erlebnis)이 작용하게 되면 이렇게 형성된 의식 내용은 망상이므로 비본질적이다.
_103쪽, 《신과 토의 상관관계론》 중에서
언제부턴가 인간은 종교 그 자체를 이념화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종교를 이념화함으로써 종교를 주의(Ism)의 한 형식으로 이질화했고, 이를 절대 신앙화함으로써 종교 간의 갈등을 유발했다. 종교의 이질화는 종교를 비본질화했으며, 이렇게 되면서 종교는 무신론이나 이신론, 신비주의나 광신주의, 유사종교나 사이비 종교, 국가종교나 민족종교 등으로 변질되었다.
_121쪽, 《종교주의에서 탈종교주의로 전환》중에서
언어란 대상(Ding)을 서술하는 표현도구인가, 대상을 담고 있는 그릇인가? 다시 말해서 언어란 후험적(a?posteriori)인가, 선험적(a?priori)인가? 이 질문은 존재론적으로 풀이되어야 할 인식론과도 관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존재는 언어보다 먼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A라는 사람이 책상 위에 있는 ‘연필’을 보며 ‘이 연필은 파랗다’고 말한 경우, 언어는 대상을 서술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B라는 사람이 대상으로서의 연필보다는 연필의 본질 그 자체, 즉 물자체(Ding an sich)를 규명함으로써 ‘파란색 연필’을 표상할 수 있었다면, B에게서 ‘파란색 연필’은 개념으로 존재한다. 이 경우 언어는 물자체를 담고 있는 그릇인 셈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M. Heidegger)이란 말은 이 경우에 해당한다.
_157쪽, 《언어란 무엇인가?》 중에서
남의 땅에서 계시된 신의 모습과 말씀을 신앙의 원형으로 생각하고 믿는 행위는 맹신이며, “하나님의 땅화”, “그리스도의 한국화”, “그리스도의 한국인화”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바리새적 위선이다. 한국인이 “하나님의 형상”인 한, 하나님은 한국인의 형상으로 한국인과 관계하며, 한국어로 대화한다.
_176쪽, 《언어의 신학》 중에서
철학의 한계는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철학의 한계는 철학의 위기로 이어지고, 철학의 위기는 결국 인문학의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경제적 생산성과 사회적 실용성의 관점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진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이유로 인문학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문학의 학문성 자체가 생산성이나 실용성에 의해 평가되기 시작하면 인문학은 사상으로서의 매력을 잃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인문학 스스로 사상을 담아내길 포기했음을 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말하려는 것은 철학의 한계가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 《식물은 무엇을 말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