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진리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알고 믿음 생활을 한다면, 우리 안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라는 것과 우리가 믿는 그분이 정말 ‘사랑 자체’이시라고 믿는다면, 앞에서 말했듯, 우리가 가진 인생관, 세계관, 인간관, 역사관, 자기 인식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관점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사랑의 세계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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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은 전혀 다른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예레미야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이 땅에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지를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모태에서 형성되기 전에, 또한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와 대면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아는 존재가 있었다. 누구인가?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빚고, 짓고, 조성한 분이 계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가진 출생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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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예수 그리스도는 어둡고 우울한 얼굴로 온 세상의 고난의 십자가를 다 지고 가는 가련한 양이 아니시다. 그분은 아버지께 사랑받고 있음을 알기에 당신에게 허락된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신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고 기쁨을 가져오는 신비한 힘이기 때문이다. 성부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당당한 개선장군의 기개와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열망을 품고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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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의 삶은 고유하고 독특하며 유일한 것이다.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 흙수저로 태어났다고 해서 한탄하는 것은 평생을 오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 안에서는 흙수저도, 은수저도 없고 오직 성령 수저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때 우리 안에 있는 베드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계속 시선을 주면, 어느 날 자신이 정말로 독수리인 것을 알게 된다.
--- p.69-70
성경적으로 보면 우리는 가인의 후예가 아니라 노아의 후예다. 이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무지개 언약 속에서 시작된 인생이다. 이 부분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라 말하는 패러다임 속에 있는 것이다. 음지와 양지에 골고루 비를 주시는 하나님, 독생자를 내어 주실 정도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인 것이다(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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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게 하는 참된 힘(능력)은 우리 입에 들어가는 물리적 에너지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결국 이것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를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광야다. 그런데 왜 광야가 저주의 길인가?
--- p.107-108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에는 속성이 있다. 사랑은 사랑 받는 대상이 이 사랑의 축제 안에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내가 그를 사랑하듯 그도 언젠가는 자신을 향한 나의 사랑을 깨달아 결국 나를 사랑하기를 원한다. 사랑의 유통 통로를 통해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무서워서, 두려워서, 벌 받고 싶지 않아서 “잘못했어요”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인데 왕의 자녀의 품격과 격조를 잃어버린 채 비루하게 죄의 노리개 역할을 한 것에 대해 너무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고, 이런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고, 그럼에도 다시 품어 주심에 너무나 감사해서 주님께 ‘돌아서는 것’(turning), 그것이 회개(μετ?νοια)다.
--- p.133
피조물인 우리는 빨리 항복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다. 버텨 봐야 그만큼 세월만 보내고, 몸과 정신이 상하며 쇠약해진다.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에게 승복을 받아 내신다.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과 시험해서 이길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빨리 순복한다.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못해 하는 굴복이 아니다. 이것은 ‘행복한 항복’(happy surrendering)이다. 비로소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로 찾아갔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이 서서히 인생 광야를 벗어나게 해 주신다. 이 과정에서는 하나님만 붙들고 그 한 분에게만 인생을 걸어야 한다.
--- p.155
예수님은 어떻게 거짓된 믿음으로 가지 않으셨을까? 살면서 많은 박해와 공격과 오해를 받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안에서 이겨 내셨을까?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변하여 순한 양이 하이에나가 되고 늑대가 된다. 모조 명품 가방이 비를 맞으면 변질되어 그 본모습을 드러내듯이, 인생의 험한 비바람을 만나면 아직 진품이 되지 못한 우리는 거칠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그 많은 외부의 공격에도 양으로 시작해서 끝까지 양으로 십자가를 향해 가실 수 있었을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의 내적 존귀함을 견고히 지켜 주었다.
--- p.185
복음이 진짜 우리 심령에 부딪혀 오면, 이 복음은 우리 안의 모든 악한 힘을 무력화시켜 버린다. 자기(에고)를 넘어서게 하고, 자기 죄를 자복하게 한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가진 내적 심리적 증세와 상처를 회복시켜 준다. 온갖 잘못된 열망에서 놓임 받기 시작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돈을 좇고 쾌락과 명예와 힘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이 우상처럼 몰고 가는 모든 힘을 다 분쇄해 버리는 힘이 복음 안에 있다. 그리고 더 아름답고 더 고상한 가치를 이제부터 추구하며 살게 해 준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 p.203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일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명예와 만족감을 위해서 사역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점점 알아 가고 사랑하게 되면서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간다. 더 이상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게 된다.
--- p.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