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가끔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소박한 하루를 만들기 위해서도 애써봤으면 좋겠다. 언젠가 당신이 된장찌개를 끓여 먹는 날, 나의 이야기를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날 당신의 하루는 미움과 시기, 질투 대신 소박한 행복과 만족, 사랑으로 가득할 테니!
--- p.27
그리하여 난, 시금치 수프를 차려 놓고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는다. 천천히 외투를 벗겨주고, 그녀의 손에 은빛 스푼을 쥐여준다. 그녀는 몇 숟갈 뜬 뒤 얼굴색이 환해지고, 지켜보고 있던 내게 묻는다.
“그런데 왜 하필 시금치야?”
“그건··. 그 아저씨가 그러더라고. 힘이 필요할 때, 항상 시금치를 찾아.”
“아저씨? 누구?”
“뽀·· 뽀빠이 아저씨.”
--- pp.42-43
어느 정도의 부자를 꿈꾸는지도 한번 말해볼까? 그건 바로 규동, 그러니까 소고기덮밥에 올린 소고기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에 달려있다. 1등급 한우 차돌박이를 산처럼 쌓아 규동을 만들 수 있다면, 난 그걸로 족하다. 재료도 많이 필요 없다. 멸치육수에 설탕, 간장, 액젓을 넣고 끓이다가 채 썬 양파를 한가득 부어주고, 양파가 반 정도 투명해지면 소고기를 잔뜩 넣어 육수가 베이게끔 졸여준다. 달걀물을 두르고 익혀줘도 되는데, 뭐 없어도 그만이다. 고기가 산처럼 쌓여있는데 다른 게 뭐가 필요해! 흰 쌀밥 위에 고기와 양파를 덮어주고 달걀노른자와 잘게 썬 대파로 플레이팅. 끝!
--- pp.78-79
그나저나 말이다. 지구인은 누구나 요리를 해야 한다. 내가 지금 먹고 싶은 그 맛을 구현할 수 있는 건 바로 나, 나밖에 없다는 걸 왜 지구인들은 모르고 있을까. 누구나 요리사가 될 순 없지만, 누구나 요리를 할 수는 있는데 말이다. 물론 난, 나보다 소중한 지구인의 입맛을 더 존중할 것이다. 떡 없는 떡볶이를 넘어 김치 없는 김치찌개, 닭이 없는 닭갈비를 원한다 해도 나는 늘 누군가와 함께 맛있는 저녁을 즐길 것이다. 모두가 우릴 틀렸다고 말해도 우린, 계속 그렇게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 p.98
다시 말하지만, 삶의 선택은 내가 주인이어야 한다. 외부로부터 강요받거나 타인에게 휘둘리며 억지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이 있다면, 과감히 초간단 콩국수를 만들어 먹어보길 권한다. 아주, 용기있게, 소금이든 설탕이든 팍팍 뿌려 먹기를. 고작 콩국수에 넣는 소금으로 소신있는 삶을 논한다는 게 조금 우습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세상 모든 이치는 사소한 곳에도 다 녹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요리를 한다. 내일은 더 나은 삶이 되길 바라며.
--- p.109
나는 이제 -콩깍지가 씌었는지- 감자가 참 좋다. 특유의 진한 고소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짠맛, 단맛, 신맛, 심지어 매운맛까지 여러 가지 맛과 다 잘 어우러지는 장점마저 지녔다. 특히 튀기고 찌고 굽는 어떤 방식도 다 받아들이는 포용력까지 갖추고 있어 감자 요리는 지구인 누구나 쉽게 즐기는 편이다. 프랑스의 프렌치 프라이, 미국의 매쉬드 포테이토, 이탈리아의 뇨끼, 그리고 강원도의 감자옹심이까지! 그러고 보니 감자의 매력은 그간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나만 못생겼다며 괜한 선입견으로 감자를 멀리하고 있던 거구나?
--- p.137
다 삶아진 소면은 찬물에 벅벅 빨아준다. 헹구는 수준이어선 안 된다. 정말 빨래를 빨 듯 거칠게 소면을 다뤄 주어야만 쫄깃하고 탱탱한 식감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완성된 소면을 깔고, 양념장을 넣고, 열무김치를 썰어 넣은 다음, 열무 김치통을 기울여 김칫국물을 살짝 부어주면 당신이 머문 그 공간은 천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 음식의 핵심은 김칫국물이다. 무너진 균형을 맞춰주는 천사의 날갯짓이라고 해야 할까. 오죽 맛있었으면 마침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김칫국물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랬다면 지구인 모두가 천국에서 살 텐데.
--- p.168
신은 우리에게 어김없이 잔인한 계절을 선사하지만, 그 잔인함은 역설적으로 희망과 사랑, 온기를 잉태하기도 한다. 그건 모두 우리 지구인에게 달렸다. 신은 언제나처럼 우릴 시험하는 것일지도. 허나 결코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신의 시험에 당당히 응해주려 한다. 나누면 오히려 채워지는 마법, 둥그렁땡을 기억하며 오늘도 부엌에서 요리를 한다. 위로받고 싶은 당신이라도, 위로받기보다는 위로를 하자. 그렇게 사는 삶은 절로 당신을 위로해줄 것이다. 그것이 신의 시험에서 승리하는 비법이다. 우린,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 p.175
당신이 두부 멘탈이든 유리 멘탈이든 아니면 쿠크다스 멘탈이든, 그로 인해 괴롭고 지치고 힘이 든다면 글을 쓰든, 달리든, 요리를 하든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꼭 시도해봤으면 좋겠다. 가만히 있으면 계속해서 으스러질 테지만, 수분기를 제거하고 전분 가루를 발라 들기름에 바싹 구워내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강철 두부 멘탈로 거듭날 수 있을 테니까.
--- p.209
지구라는 별에는 항상 이슈가 있다. 그런데 그 이슈가 지구인 한 사람 한 사람의 피부에 닿기엔 그 거리감이 상당하다. 그래서 다들, 외면하기 일쑤다. 안타깝게도 이슈들의 먹이는 사실 외면이다. 외면하면 할수록 몸집을 잔뜩 부풀려 지구인들과의 거리를 좁혀나간다. 그러고 나서야 지구인들은 후회하겠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는. 감히 당신에게 외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구인이라면, 외계인이 아니라면, 이제 ‘외면’이란 먹이를 주는 일을 멈추어보자.
--- 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