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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문학동네시인선-215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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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6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152쪽 | 130*224*20mm
ISBN13 9791141606435
ISBN10 1141606437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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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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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심심하고 담담한 내음의 빛깔을 반야의 속종으로 알 거야

인멸을 모르는 초록의 어스름, 결별을 모르는 만남의 먼동이 예 서렸으니

주검을 눕혀놓으면 너무 편안하다 가만 죽은 뒤에도 생각이 번지는 몸을 어쩌나

식물원에 수형된 풋것들은, 가끔 여길 떠올릴 때 호젓한 기색이 만연해

누군가 예 와서는 말이야, 생각 없이 눈물 흘리는데 너무 벅차고 고요해_
--- 「이끼 반야(般若)」 중에서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거기 대보는 오후의 적막이 좋다_
--- 「신문」 중에서

이번 여름은 빗소리가, 자주 붓을 들었다

흘리듯 듣는 것으로 몸속엔 화선지가 자주 펼쳐졌다

매미 소리가 세찬 여울로 쓸고 가는 새벽엔 한 획이 만 획인 듯 새하얘졌다_
--- 「여름의 낙관」 중에서

사거리 아스팔트에 반사된 햇빛이
네덜란드의 눈부심 같았다
암스테르담 뒷골목 어느 오후의 적막한 빛과 그늘 같았다
거기 가보지 않고 여기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들,
네덜란드, 다르게는 화란(和蘭)이라는 이름으로
겨울 거실에 붉은 제라늄도 피었다
한 나라가 한 나라 밖에도 번져나 살듯
그대는 내게 불쑥 얼굴을 맞댄
네덜란드의 어떤 눈망울,
암스테르담의 빛과 그늘로 짠 바람의 외투들
사랑 외에 더 추가할 것이 있는가_
--- 「네덜란드의 햇빛」 중에서

나를 미워하고 또 사랑하는 이가 있어
그로부터 이리 떨어진 적막의 몸을
내게는 좌천된 자의 음식이라 굽거나 찌고 썰어서
메마른 속을 달래는
눈 그친 별밤이라 불러본다_
--- 「폭설과 동파육(東坡肉)」 중에서

칠흑에서 초록의 여름이 갈려 나올 때
내줄 수 있을 때까지 내주자고
가둘 수 없이 번져보자고
연애의 먹을 갈아대지요_
--- 「수묵(水墨)」 중에서

양말을 풀어 던지고 세숫대야에 발 씻어
과꽃 시드는 화단에 나비물 번져 버릴 때
두레상에 모처럼 식구 수대로 수저 내려앉는 된소리가 으늑한 내게
너의 번뇌는 얼마나 따스한 피곤인가
피곤한 눈맞춤은 얼마만한 다정인가_
--- 「저녁의 물음」 중에서

무감각에서 사랑의 살결을 꺼내보자는 당신,
무감각에서 농담처럼
절창의 열매를 맺어보자는 기담,
저 청보랏빛 수국도
빛바랜 무감각을 밤바람에 헹궈내듯
아파트 화단에 전직 동대표처럼 헛기침을 하는 것이지요_
--- 「무감각」 중에서

나는 조망의 천재처럼
조금씩 이야기를 모으나보다
조금만 더 살을 붙이면 사랑이 내 팔을 끌어
그윽한 언덕으로 가자 할 테니

거기, 허공에 등을 기대앉아
바다의 결혼식과 하늘의 장례식을 포갠 수평선을
그대 조망의 천재로 날 부르듯
아니 살까 아니 죽을 수 없듯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_
--- 「언덕」 중에서

가만가만 웃고 벼락처럼 꾸짖고
버들처럼 능청맞고 이끼처럼 소슬하고
가을이 반 미쳐서 온 맑음이면
나머지 반은 내가 끝 모르게 미쳐갈 맑음들,
이 가을에 나는 습득되었다_
--- 「습득(拾得)」 중에서

허물을 모으고 포개놓으니 꽃과 같다
생각은 어둠에 맞는 먼동의 옷을 입으려 하고
거꾸로 놓은 앞날의 모래시계를 되짚어놓고
나의 미래의 훗날을 오늘로서 되살리는,
가만히 노래하면 얼음 속에 수런대는 풀들
마음에 거둔 적 없는 다솜을 걸어가라 흔들리는_
--- 「시방 나는」 중에서

꽃이 오는 보폭을 재는
역광과 반그늘의 눈금자,
그 곁에 제자리서도 엇박자를 놓는 나를
그대가 문득 다가와 내 가슴에
사다리를 놓듯
턱, 하니 그대 눈총을 드리우는 날_
--- 「무극(無極)」 중에서

어느 날 나는 나로부터 가만히 배워 나온 물건,
그윽한 영혼을 꾸미기 전 옥생각을 주물러서
감정의 호흡마저 나무에게 건네주는
사막과 광야로부터 동터오는
나[我]라는 외딴 물건

그대 눈빛을 끌어 저울질하는 생각이라는 물질,
너무 번지거나 번지지 않아서
번민이 파다한 나[我]라는 물건,
햇빛을 부르는 그늘의 나에게
번민도 값진 물건, 다솜을 건사하는 반그늘 같은
언제부턴가 늦된 물건인 나를 버드나무 자란 육교를 걸리며
툭 트여갈까, 셈평을 흔드는 가을 여뀌 곁에
갓 맑은 쓸쓸함마저 골동이라네_
--- 「골동-나[我]」 중에서

슬픔이 고요해진 눈빛 같은 거
사랑이
틀어놓은 옛 축음기 같은 거
내 무릎을 짚으면
방금처럼
그대 눈길이 다녀간다_
--- 「가을 무릎-여음(餘音)」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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