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다. 리사와 함께 여행할 곳은. 더불어 내 마음속의 이탈리아는 언제나 여름이 아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봐도 이탈리아의 겨울 풍경을 그려본 적이 없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뜨거운 햇빛과 그 색을 빈틈없이 담아내는 도시. 내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는 이런 여름의 장면으로 가득했다. 넉넉한 리넨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쯤 풀어헤치고 제법 손때가 묻은 파나마모자를 머리 위에 얹고서 강렬한 태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 시원한 바다와 이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즐기는 모습. 게다가 사람들의 섬세한 매너와 다정함은 늘 아름다운 여름의 이탈리아를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것도 이탈리아의 큰 도시가 아닌,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도시여야 했다.
--- p.56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중에서
갓 구운 크루아상을 한 손에 들고 베어 무는데, 리사가 말한다.
“아빠, 나도 커피 마셔봐도 돼?”
나도 어렸을 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린이는 커피 마시면 안 돼. 커피 마시면 머리 나빠져.” 어린 마음에 머리가 나빠진다는데 정작 본인들은 왜 마시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리사에게 그런 대답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에스프레소 잔 받침에 올려두었던 티스푼에 커피를 살짝 담아 “먹어봐.” 하며 건네주었다. 예상했지만 잔뜩 일그러지는 표정에서 대답을 듣지 않아도 리사가 생각하는 커피 맛을 알 수 있었다.
--- pp.99-100 「에스프레소와 흰 우유」중에서
리사가 물고기를 찾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즐기고 있는데, 그 순간 문득 왠지 모를 어색함이 엄습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가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갑자기 서울에서 한창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생각나고, 확인해야 할 이메일이 가득 쌓여 있을 것 같은 불안한 기분도 들었다. 결국 핸드폰을 열어 한참 동안 이메일을 체크하고 답장하는 와중에, 바다에서 “아빠!!!” 하고 부르는 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들어오라는 손짓과 함께.
아드리아해의 청명한 바다를 앞에 두고 이메일 체크라니. 아무래도 이상한 행동이었다. 리사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하고, 가방에 핸드폰을 넣어두고 바다로 들어가려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는 항상 소지품을 조심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냥 두고 들어가려니 영 불안했다. 옆자리에 아이들과 함께 온 한 여성에게 잠시 소지품을 봐줄 수 있는지 부탁해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이 동네에서는 그런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바다를 즐겨도 돼요.”
--- pp.106-107 「첫 바다 수영, 첫 오레키에테, 그리고 첫 올리브」중에서
매장 안으로 들어가 마음에 드는 옷을 찾기 위해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십여 분 넘게 신중하게 비교하더니 리사는 원피스 두 벌을 선택했다. 부드럽고 하늘하늘한 소재의 흰색 원피스와 에스닉 패턴이 들어간 원피스였는데,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블링블링한 핑크색 공주 드레스를 찾던 리사의 취향과는 사뭇 달랐다. 몸과 마음이 성장하는 만큼 취향도 새롭게 바뀌어가나 보다. 이곳의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은 원피스를 양손에 들고 리사는 한껏 설렌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고 지갑을 열지 않을 아빠가 어디 있을까. 나는 흔쾌히 구매했고 리사는 탈의실에서 바로 갈아입고 나왔다. 하늘하늘한 소재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리저리 뱅글뱅글 돌면서 둥글게 퍼지는 치맛자락을 보며 즐거워했다.
--- pp.121-122 「자연스럽고 근사한 복장으로」중에서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간 것만 같은 그곳에는 햇빛을 머금은 바위들이 황금색으로 빛났고 높지 않은 바위 절벽 사이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녹청색의 바다 풀장이 무수히 많이 있었다. 푸른 하늘을 품은 맑고 투명한 물 아래로 오색 물고기와 산호초들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로 손색이 없는 훌륭한 장소였다. 길을 잃기로 마음먹자, 새로운 길이 열렸다.
이미 출발할 때부터 수영복 차림을 하고 있던 우리는 가방을 내려둔 채 곧바로 물에 뛰어들었다. 바닷물은 뜨거운 해풍을 식혀줄 만큼 시원했고, 몸을 가눌 수 있을 정도로만 잔잔히 출렁이는 파도는 리사와 함께 즐기기에 충분히 좋았다.
--- p.130 「길을 잃어버리기로」중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풍경의 연속이었다.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종유석, 석순, 석주 등 진귀한 동굴 속 풍경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다. 종유석은 위에서 아래로 자라는 것, 석순은 종유석에서 떨어진 것이 쌓여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것, 그리고 석주는 그 두 개가 만나 기둥이 된 것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탈리아어로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나는 내가 가진 기초 지식을 총동원해 최대한 친절히 리사에게 설명해주었다.
“아빠, 이건 조금만 기다리면 종유석과 석순이 붙어서 석주가 될 것 같아.”
“우리가 보기엔 몇 센티미터 남지 않았지만,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이 걸려야 만날 수 있을 거야.”
--- pp.166-167 「일 돌체 파르 니엔테!」중에서
“나는 여름마다 아빠랑 이렇게 여행할 거야.”
리사가 이 말을 꺼내는데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며 설렜다. 매년 이렇게 리사와 둘이서 여행하는 것.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결혼하기 전부터 ‘내가 만약 아빠가 된다면’ 정말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인데…. 이제는 리사와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 나의 목표가 되었다. 벌써 내년 여름에는, 그리고 앞으로 매해 여름마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나열하고 있었다. 다음 여행을 떠올리기만 해도 ‘긍정적 환상’이 마구 샘솟았다.
--- p.176 「다시 제자리로 가야 할 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