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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학의 창시자라고 할 이광수와 김동인을 제외하면 한국 근현대 문학에서 시인으로는 정지용, 소설가로는 이태준, 그리고 비평가로는 최재서를 최고의 문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세 사람은 한국 근현대 문학의 집을 굳건히 떠받들고 있는 세 기둥이다. 이렇듯 적어도 나에게 문학 이론가로, 문학 비평가로, 영문학자로, 번역가로 최재서가 차지하는 몫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최재서의 업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성인전’을 쓰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국 문학사에서 업적이 뛰어난 만큼 친일 행위에서 보여지는 과오와 실수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의 행적에서 좋은 점은 좋은 대로, 나쁜 점은 나쁜 대로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평가하려고 애썼다. 물론 객관적 기술과 평가라는 것도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세계관과 문학관에 굴절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영문학과 한국 문학의 경계에서 작업해 온 인문학도로서 나는 최재서의 삶과 문학 세계를 좀 더 체계적으로 다루고 싶었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문학가로서의 최재서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한 인간으로서 그가 겪은 고뇌와 절망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문학적 성과 못지않게 자존심 강하면서도 나약한 인간 최재서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최재서는 일제 강점기라는 ‘궁핍한 시대’에 무엇을 위하여 살았을까? 우리는 최재서가 남긴 빵과 포도주에서 무슨 메시지를 찾아야 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에서 우리는 그동안 한국 문학이 지나온 길을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서문」 중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암울한 시대에 최재서가 이렇게 문학 이론가와 비평가를 비롯하여 영문학자, 번역가, 잡지 발행인 및 편집인, 심지어 창작가로서 폭넓게 활약했다는 것은 여간 놀랍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말하는 ‘궁핍한 시대’, 최재서의 말을 빌리자면 ‘간난(艱難)한 시대’를 산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자의식을 느끼며 왕성하게 활약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좁게는 문학, 더 넓게는 문화란 풍요로운 여유가 낳는 산물이기도 하지만 마치 더러운 분비물에서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고통과 역경과 시련의 산물이기도 하다.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