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매가 속삭임으로 나를 깨운다.
--- 첫 문장
캐럴라인이 나의 피로 뒤덮여 있다. 몸은 오그라든 채. 그녀의 얼굴이 가장 마지막까지 움찔거리다가 멈춘다. 마치 인형처럼, 한쪽 눈은 부릅떴고 한쪽 눈은 반쯤 감겼다.
캐럴라인은 죽어가며 날 쳐다본다. 캐럴라인이 웃는다.
--- p.15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분열이라는 것. 사람이 죽으면, 그동안 그가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물건들 속으로 그의 영혼이 흩어진다는 것. 사랑, 멍 자국, 선물들 속으로.
--- p.17
나는 조심스럽게 초를 뒤집어본다. 밀랍으로 만든 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숨을 헉 들이킨다. 하마터면 초를 떨어뜨릴 뻔한다.
--- p.32
멈추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이 황금색 벌을 쓸어내린다. 귀고리가 여전히 따듯하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나온 온기다.
그때 캐럴라인의 귀에서 무언가가 기어나온다.
--- p.37
우리도 그 뒤를 따라, 먼지와 꽃가루, 햇살의 황금빛 구름 속으로 들어선다. 에스펜의 햇살은 장렬하고도 집요하다. 마치 부담스러운 포옹처럼.
--- p.62
타일러의 눈이 매니큐어를 칠한 나의 손톱과 드러낸 허벅다리와 샌들을 오가더니 내 얼굴로 돌아오지 않는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실을 꼬아 만든 팔찌를 하나도 아닌 여러 개 착용하고 있다.
--- p.96
이제 웬디는 한 손을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다. 다른 한 손을 얼굴들의 바다로 뻗는다. 손들이 다가와 그녀를 잡는다. 그리고 나를 잡는다. 내 양쪽 어깨로 기어 올라오고, 서로 포개어지고, 손가락이 손바닥 위로, 손바닥이 손목 위로 올라가고, 나는 괴물 같은, 무거운 덩어리의 한복판에 엉켜있다.
--- p.105
미안해. 그리울 거야. 넌 아름다웠어. 편히 쉬기를. 안녕. 미안해. 안녕. 미안해. 안녕. 미안해.
--- p.106
우리는 하나로 왔다!
우리는 여럿으로 떠난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
우리는 전부를 갖고 떠난다!
에스펜이여, 과거의 영광을 앞으로도 영원히!
에스펜이여, 과거의 영광을 앞으로도 영원히!
--- p.108
나무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면서, 누군가 내게 장난을 친 거라는 결론을 내린다. 소용돌이들도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깜빡인다.
나는 일어나 앉는다.
숨을 참는다.
헛것을 본 모양이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나무의 옹이가 다시 깜빡인다.
--- pp.112-113
에스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들었던 바로 그 소리. 진동하는, 뜨거운, 허공에 흠뻑 스며드는 그 소리. 다만, 이번에는 소리가 더 크다. 갑자기 그 소리가 내 안으로 들어와, 눈 안쪽에서 기어다닌다.
--- p.150
내가 그들 중 한 명이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될까?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악랄할까?
그리고 얼마나 안전할까? 어쩌면 나도 경박함과 따분함과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진 여러 겹의 베일 속에서 안전할지도 모른다.
--- p.154
한낮의 태양 아래 반짝이는 벌통들이 보이고, 그 위에는 벌들이, 어디에나 있지만 보이지 않는 벌들이 있다. 허공에 떠있는 상상 속의 반짝이 가루처럼.
--- p.173
나는 와이엇을 쳐다보며 와이엇도 나를 쳐다보기를 바란다. 그는 나를 보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에 모닥불을 피웠을 때, 그는 내 곁에 앉는다. 그 순간 나의 꼬리뼈를 타고 전류가 흐른다.
--- p.180
나는 나를 관찰하는 와이엇을 관찰한다. 야외에서 보니, 서로 색이 다른 그의 두 눈이 훨씬 더 밝아 보인다. 재미있어하는 표정 뒤에, 잘난 체하는 표정 뒤에, 매혹이 있다. 아마도 그에겐 낯설겠지만, 나에게는 선명한 갈망이 있다.
--- p.195
와이엇과 나누어 마신 꿀의 나른하게 진한 맛. 그 온기가 여전히 나의 위에 남아서, 가느다란 실처럼 내 안에서 퍼져나가고, 마치 살갗 속의 장갑처럼 내 손안에서 고동친다.
--- p.204
나는 캐럴라인은 잊고 어두운 정원에서 춤을 추던 나를 잊는다. 나의 슬픔도 완전히 잊는다. 의심도 잊는다. 그러나 의심은 내 시야를 벗어난 곳에 도사리고 있다. 내 시야가 닿지 않는 어두운 곳, 테라스의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시신처럼. 그 시신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갈라진 입술로 묻는다. 왜? 왜 이들이 나에게 이토록 친절할까?
--- p.234
미미가 위치를 바꾸자 햇빛이 천 개의 육각형 우물 속으로 스며든다. 마치 촉촉하고 깜박이지 않는, 그러나 너무도 정밀한 눈동자가 가득한 벽이 눈을 뜨는 것 같아 어쩐지 불안하다. 그런데 모양이 어그러진 부분이 있다. 두 개의 방이 연결된 지점이 엉겨 붙어서 육각형의 모자이크에 파문을 일으킨다.
--- p.247
들쭉날쭉한 나무들 사이로 번쩍이는 달이 보인다. 나의 것이 아닌 몸속에 있다. 나는 넘어지고, 축 늘어진다. 나는 등을 대고 누워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본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덮친다. 입에서 쇳내가 난다. 나의 죽음. 깜박이던 나의 눈이 닫힌다.
--- p.264
“이건 마치…….” 내가 말하고는, 침을 삼킨다. “캐럴라인이 어디에나 있는데,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아.”
--- p.282
“사랑엔 무게가 있어. 상실감에도. 때론 그게 다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하지만 널 봐, 마스. 넌 아주 잘 버티고 있어.”
--- p.285
“어스 투 마스.” 내가 스스로 일깨운다.
눈을 떠.
현실로 돌아와.
우릴 도와줘.
--- p.320
마치 조그만 몸뚱이들이 서로의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 같은, 유동적인 꿈틀거림이다. 그러나 불빛을 비추어보면 그저 벌집일 뿐이다. 그 벌집이 눈을 뜰 때까지는.
--- p.347
숲속에 호수.
호수 건너에 초원.
초원 위에 집.
그 집을 지나 벌집.
벌집 안에, 모든 것.
모든 것.
--- p.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