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가 없는 주방에서 빵의 날 재료를 모두 비운 상자를 깔고 앉아 쓴다. 오븐은 돌아가고... 흙 부엌 아궁이 앞에 먼 얼굴로 앉아 지난날을 하나씩 태우던 할머니처럼 나는 불 앞에 앉아 하이힐을 하나씩 불 속에 던졌다. 5cm, 7cm, 나는 자꾸 높아지고 싶었지. 높이는 무너지듯 불타고 오븐은 뜨겁다. 예쁘고 무거운 가죽가방을 질질 끌고 와 쑤셔 넣는다. 산 동물의 피부는 더 부드럽다는 말이 그제야 생각나서, 내가 어깨에 멘 것은 순한 동물의 비명이어서, 비었을 때조차 살을 짓누르도록 무거웠다는 사실이 이제야 생각나서 나는 가방을 불 속에 넣으며 내 부드러운 살을 불에 대어 보기도 했지. 오븐은 내 살 위에서 더 뜨겁다. 그러고 보니 빵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빼어버린 반지가 이젠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 굵어진 손마디가 반지를 거부한다. 반지가 불타면 반지에 새긴 약속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약속을 불에 녹이는 연금술도 있을까. 알려면 해봐야 한다.
온도를 더 올려야 했기에 두꺼운 책들을 찢기 시작했다. 어려운 철학책일수록 불이 잘 붙으니 활활 훨훨 휘이 훠이 니체 선생, 맹자 선생 편히 쉬시오. 오븐은 다투듯 뜨겁다. 저렇게 뜨거운 운동장에 키가 1미터 조금 넘는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 전교생이 줄을 맞추어 벌을 받을 때 화장실 가겠다는 한마디가 어려워서 오줌을 싼 아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타는 운동장 한가운데 그 아이 주변만 밤처럼 젖었다. 운동장 네 모퉁이를 접어 그 오랜 비밀과 까만 부끄러움을 약 첩지 싸듯이 감싸 넣는다. 미안해. 젖은 기억은 잘 타지 않아요. 기저귀처럼, 썩는 데에도 오래 걸린다지만 오븐은 뜨겁다. 탈피한 제 껍질을 깔고 앉아 글을 쓰는 이는 누구일까. 이젠 깔고 앉은 상자마저 태워야 한다. 그래야 끝이다. 그래야 시작이다.
--- p.15 「다비」중에서
세상의 아름다움 밖에 사는 곁가지들을 붙들고 나는 붉은 선 가장자리에서 움찔거리다 첫 장을 뒤집었다. 무단횡단! 길을 뒤집고 정해진 칸을 글자로 밟아 넘는 일은 일탈이었을까. 결국 칸을 단 하나도 채우지 않은 채 뒷장에 빼곡히 쓴 편지로만 한 권의 원고지를 다 쓰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원고지를 뒤집어 편지를 쓴다. 담을 넘던 열세 살의 아이는 보내지 못할 편지들을 쓰다가 아직도 칸 밖에 산다. 어느 날엔 붉은 담장을 넘다 올려놓은 유리를 깨뜨리기도 하였지. 와장창 소리가 천둥 친 날에는 밤새 칸 밖을 서성여도 문장에서 유릿가루가 빛났다.
--- p.18 「붉은 담장」중에서
그 녀석이 오고 나서 눈이 많이 내렸다. 눈 위에 또 눈이, 졸린 것처럼 이불처럼 자꾸만 덮었다. 태국에서는 보지 못했을 눈이 견딜 수 없이 쏟아지던 날 진탁이는 눈을 감았다. 세종의 화장장, 은하수 공원에는 별 무리를 뒤집어쓴 듯 눈이 쌓였다. 그곳에 눈이 별처럼 빛나는 아이 셋이 있었다. 처음 보는 눈을 만지며 얼어붙은 아버지의 땅에 자꾸자꾸 별을 떨구었다.
--- p.25 「당귀」중에서
비극을 완성하려는 사람처럼, 그는 볕에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창백한 시간을 접고 쌓는 일을 어둠 속에서 하고 있다. 한겹 한겹이 독립된 하나의 삶으로 일어서 자기 노래를 끝까지 부를 때까지, 기다리면서 끝내는 부서지기 위해 매일을 결결이 쌓는 일, 이 작업의 끝에서 그는 평생 차곡차곡 모은 LP 판을 쌓아두고 거대한 해머로 단번에 내리치려는 것이다. 완전히 부서져야 마침내 완성되는 빵을 만들고 있다.
--- p.34 「페이스트리」중에서
아주 오랜만에 두 개의 철문이 동시에 열렸다. 버스 안에선 노래가 멈추지 않았다. “너를 뜨겁게 안고서 두 팔이 날개가 되어 언젠가 네게 약속했던 저 달로, 우리 푸른 꿈 싣고서 한없이 날아오를게….” 버스가 노래를 싣고 날았던가 노래가 버스를 싣고 날았던가. 치한아, 얘들아~ 가자!!! 진공의 세계에서 우리는 날개를 펼쳤다. 서른 개의 필라멘트를 켜고.
* 미평소년원 합창단은 그해 가을, [오 해피 데이], [파일럿] 두 곡으로 전국 소년원 합창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 p.40 「진공관 스피커」중에서
人生到處知何似 사람 사는 이 세상 무엇과 같은지 아는가
應似飛鴻踏雪泥 날아가던 기러기 눈밭 걷는 것과 같다네 ****
형부의 생일 밤, 다 같이 소주를 한잔하고 나서는데 함박눈이 세상의 모서리를 지우고 있었다. “눈 온다. 영인아” 눈 속으로 입김처럼 하얀 말이 번졌다. 그 말은 어느 나라의 말도 아니었다. 모든 선이 사라진 눈 위를 우리는 함께 걸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눈이 내리면 처음 맛본 동파육의 향과 접시에 담았던 소동파의 시가 떠오른다. 나는 오늘 흰 눈 같은 종이를 펼쳐 접시에 담지 못한 그다음 시구를 적어본다.
雪上偶然留指爪 눈밭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기고
飛鴻那復計東西 기러기는 날아서 어느 방향으로 간 걸까
이젠 가족이 아닌 형부는 어느 하늘에 고향을 짓고 있을까. 밖에 나서니 밤새 쌓인 눈에 지난 발자국은 다 지워져 온데간데없다.
--- p.71 「소동파 한접시」중에서
런던의 물가는 가난한 여행객을 주눅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대부분 박물관이 무료였기 때문에 더없이 만족스러운 날들을 보냈다. 나는 매일 담배 한 보루만큼의 밤을 보내고 트라팔가 광장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모네의 [수련] 앞에 앉아서 안개가 흩어놓은 물소리를 듣다가 어느 날은 고흐의 [삼나무가 있는 밀밭]에 앉아서 오전을 다 보냈다. 고흐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완성했다는 이 작품 앞에 자주 머물렀다. 밀밭은 전신을 비틀며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밀밭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에스트로 크리스토프 에셴바흐를 떠올렸다. 전쟁에서 부모를 잃고 난민수용소에서 실어증을 얻게 된 피아니스트. 전쟁의 참혹함과 열병은 어린 고아에게서 말을 앗아갔고 전쟁이 끝난 뒤에 그는 스스로 말을 버렸다. 그것이 세상이 준 크나큰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벽이었을 것이다.
--- p.105 「Sweet Ball」중에서